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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191210 #58 여행의 의미100일 글쓰기 2019. 12. 11. 06:48
#58
여행의 의미
1.
아침 일찍부터 패키지 투어를 갔다 왔다. 이번에도 혼자 온 사람이 나 혼자여서 여러모로 불편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다행히 혼자 온 사람들이 꽤 돼서 밥을 먹을 때나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나 집에 돌아올 때나 뻘쭘하지 않고 좋았다.
가장 패키지 투어를 신청한 보람이 있었다고 느끼는 것은 몽마르트 언덕. 하나의 지역이 박물관 같았다. 각 장소가 예술가의 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흥미로웠고, 좋아하는 화가의 이름이 여기저기 튀어나와서 반가웠고(모딜리아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어서 반가웠다!) 한 도시가 이렇게 많고 유명한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다는 사실이 멋있었다. 그리고 그 유적지를 훼손시키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해내는 데 성공한 프랑스인들에게 경이로움을 느꼈다. 한 번 더 가볼 생각이다.
뭐, 이번에는 빼지 않고 가이드분이 사진을 찍어주신다고 할 때마다 카메라 앞에 섰고(사실 빼기 힘든 분위기기도 했다) 전신 샷을 몇 장 얻었다. 오후부터는 루즈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들을 기념하는 장소들. 해가 지고나서는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에펠탑 앞 등 시그니처 장소들을 방문했다. 참고로 나는 아이폰 7을 사용하는데, 이 새끼가 야경을 찍는 데는 재능이 전혀 없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많은 유럽에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찾은 절충안은 해가 막 지기 시작하고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하는 초저녁, 그즈음 사진을 마구 찍어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시그니처 장소들을 찾아간 시간은 해가 완전히 진 밤 물렵이었다. 따라서 사진도 영상도 내가 원하는 것처럼 예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내 기억에 남아있으니까.
정말 엿같았던 건 추위. 스페인과 니스에 있다가 온 내 입장에서는 조오오올라게 춥다. 아침에 자유시간이 생기자마자 기념품샵에서 장갑부터 샀다. 그 이후로는 목이 추워서 견디기 힘들어 목도리를 사려고 돌아다녀봤는데 도저히 마음에 드는 게 보이지 않았다. 내일 둘러볼 생각이다. 지금 내가 찾는 것은 노란색 목도리인데 (황토색 코트와 남색 재킷, 둘 모두에 어울리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헤헤) 마음에 드는 건 딱 하나 발견했고 가격이 40유로가 넘어서 바로 포기했다.
음, 그리고 패키지 투어의 일원은 자금이 넉넉한 사회인이 대부분인데 그러다보니 그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먹을 걸 사들이는데 돈을 꽤 썼다. 아침부터 사 먹은 스타벅스 커피에(진저브레드 라떼라는 음료였는데 별로였다) 점심값으로만 20유로를 넘게 쓰지 않나, 간식으로 다시 뱅쇼를 사 먹지 않나. 일행들이 너도나도 사 먹으고 가이드가 이곳이 맛있다고 부추기니 사 먹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윽, 그래도 아껴 써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다. 다행히 민박집에서 아침과 저녁을 제공해줘서 앞으로는 식비를 아낄 수 있을 것 같다.
2.
민박집에 돌아오니 한참 저녁을 먹는 시간이었다. 어쩌다보니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같은 이용객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여러모로 유용한 정보들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신기했다. 이런 재미에 한인 민박을 찾아다니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일 일정하나를 만들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다짐하는 것은 이 와중에도 휩쓸리지 않고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을 까먹지 않는 것. 나는 혼자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시간이 즐겁고, 음악을 듣는 시간이 즐겁고 (백예린 신보가 나와서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다!) 몸을 노곤히 녹이며 영상을 보는 게 즐겁다. 이걸 굳이 남들이 재밌어 보이는 짓거리에 끼어들자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다. 너무 거창하게 썼나?
3.
문득 이때까지 여행했던 장소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런던, 마드리드,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그라나다를 제외하고는 한번 다시 찾아가고 싶다. 다시 찾아갔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꽉 채워서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더 보람차게 보낼 자신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데려가야지. 그때는 돈을 충분히 모아서 에어비앤비를 사용할 거고,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다시 한번 가고픈 장소를 발견하는데도 여행의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해본 나는 그 세상이 주는 다른 즐거움을 깨달은 것이고, 다시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전에 누군가 쓴 여행 에세이에서 한 번 가봤던 장소를 몇 번이고 다시 방문하는 것을 남몰래 좋아한다는 글귀를 읽고는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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