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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191208 #56 공허하지만 안정감 있는100일 글쓰기 2019. 12. 9. 05:13
#56
공허하지만 안정감 있는
Monaco 어제 그다지 좋은 밤을 보내지 못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인터넷 방랑 증상(아무런 목적 없이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버리는 것)이 재발했고 오늘 관광지를 어디 어디 들릴지도 결정을 못한 채 잠이 들고 말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잠도 설쳤다.
원래 계획은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앙티브와 모나코를 둘 다 들르는 것이었다. 당차게 니스 기차역으로 향해 앙티브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기차표를 사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일단 티켓을 사는 기계를 조작하는 것 자체도 까다로웠고, 겨우 조작방법을 깨닫자 카드 결제가 안됐고(한 다섯 번은 가지고 있는 카드를 모두 이용해 시도해봤다), 주변 편의점에서 동전을 겨우 받아와서 해냈다. 근데 기차표를 사고 플랫폼으로 들어가자 어느 정거장에서 기다려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다. 지하를 헤매다가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도착시간에 맞춰서 그때 도착하는 기차를 타면 되겠지, 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 적힌 대로 기차가 도착하지 않았다! 엊그제 니스에 도착해서도 그랬는데, 구글 맵은 니스의 기차와 버스의 시간표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플랫폼에 뜬 화면을 보니, 진짜 시간표대로라면 앙티브로 향하는 기차가 도착하기까지는 거의 세 시간이 남아있었다. 세 시간을 마냥 기다릴 자신도 없었고, 기차역이 지긋지긋하고 짜증 났다. 막무가내로 기차역을 빠져나가 모나코를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나코를 향하면서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그러다가 고작 이런 일 하나로 내 하루를 망치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효과가 좋았다) 네이버 검색으로 (이번 여행으로 네이버 블로그의 존재 의의를 깨달았다... 필요한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 정말로.) 모나코를 가는 버스의 정류장을 찾아냈고, 자신이 어디서 왔고 무슨 일로 벌어먹고 사는지를 떠벌리는 백인들 사이에 끼여서 모나코로 향했다. 늦게 버스를 타서 창밖으로 보이는 바닷가의 경치를 감상할 자리에 타지는 못했다.
모나코는 작았고, 공허했다. 보이는 사람은 세 종류였는데, 현지의 경찰과, 모나코에 오래 머무르는 듯한 부유한 관광객들, 그리고 나처럼 니스에 있다가 구경을 할 겸 모나코에 잠깐 들린 여유 없는 관광객들, 이렇게. 한국에서 찢어온 여행책에 나와있는 건물들을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다 돌아봤다. 카지노는 당연히 제외하고. 경치 하나는 더럽게 예뻤다. 아침에 못 찍은 양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지겹도록 사진을 찍었다. 기념품샵에서 자석 하나를 사고 미련 없이 니스로 다시 향했다. 여권에 도장을 받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내년에 러시아를 가보고 싶어서 굳이 받지 않았다.
니스에 도착한 후 버스에서 내려서 바닷가를 다시 산책했다. 어제 산책한 바닷가의 도로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붙어있는 곳이었다면, 오늘 돌아다닌 곳은 요트가 사람보다 더 많은 부둣가였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92914의 노래를 듣다가 뜬금없이 Avril Lavigne의 첫 앨범을 들으며 걸었다.
나는 벌써 여행이 끝난 후 현실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을 상상한다.
그 날을 꿈꾸지는 않는다. 비록 불편한 점이 미치도록 많지만, 여행을 하면서 소소한 문제들을 잊고, 새로운 습관을 찾고, 낯선 언어를 맞이하는 것은 재밌다. 일상에서 마주할 진지한 단계를 아직까지는 무시하고 싶은 것도 있다.
그냥, 여행을 하다 보니 반병신처럼 지냈던 지난 몇 달과 달리 많은 걸 알게 되었고, 그걸 일상에 적용시키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조금은 더 나은 하루들을 쌓아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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