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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191103 #21 나에게 다정했던 사람들100일 글쓰기 2019. 11. 4. 01:58
#21
나에게 다정했던 어른들
알폰스 무하의 작품 나에게 다정했던 어른들은 극히 적었다. 그 때문에 유달리 열등감에 쌓여 하루하루를 보내왔던 것도 같다. 정말 그 손에 꼽힐 정도로 적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를 다정히 대해줘서 고마웠다고 편지를 쓰고 싶은 어른들에 대하여.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유년시절에 어떤 짓을 저지르더라도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인간이 한 명쯤은 필요하다. 나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인간이 없었고. 일곱 살 때 암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 라면, 내가 부모님과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우든, 학교를 때려치우든,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땡강을 부리든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할머니는 '특별히' 나를 아껴주시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때,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 두 분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냉정하신 중년의 여성분이셨다. 그래서 그분의 칭찬을 들을 때면 하루 종일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교실에 비치되어있던 학급문고를 모조리 읽어치우던 나를 보고 책벌레라고 다소 장난스러운 어투로 칭하셨고, 개교기념일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내가 그려낸 작품을 보고 이번에는 우리 00이 그림이 가장 멋있네,라고 온 교실의 아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평하셨다. 3학년에 올라가는 나에게 뭔가 의미 있는 말을 잔뜩 건네주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이 나에게 보여주셨던 호의는 지금 생각해보면 불쾌하다. 선생님은 어머니와 몇 다리 건너 아는 사이셔서 툭하며 그걸 언급하며 특별 대우를 해주셨고, 나의 작은 성과를 소리 내어 좋게 평하셨다. 그것 때문에 티 나지 않는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최근의 일이지만, 누군가의 칭찬이 고팠던 어린 관종에게는 한 명의 성자였다.
중학교 3학년 때의 국어선생님도 떠오른다. 남들이 들으면 피식거릴 정도의 작은 관심이지만, 그래도 의미 있었기 때문에 적어본다. 국어공부를 (그나마) 열심히 하던 나에게 몇 번 관심을 보이셔서 말을 먼저 걸어주셨고, 쉬는 시간에 읽다가 엎어놓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중학생이라니, 얼마나 재수 없는가) 책을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함께 나누었다. 학기 말에는 혹시 자사고에 진학할 생각이 없는지, 국어 성적이 좋아서 물어본다고 살펴주시기까지 하였다. 마지막 거는 웬만한 학생들에게 다 물어보셨던 거니 전혀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아, 괜히 책 때문에 얘기를 나누게 된 게 민망해서 다음 수업시간부터는 읽던 책은 절대 책상에 올려놓지 않았다.
작년에 9개월동안 지겹도록 얼굴을 마주했던 재수학원의 담임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떠올려본다. 역시 이분도 나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시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다정함과 관심을 쏟아주셨고 그 정도도 나에게는 충분했다. 정말 작은 양이더라도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은 얼마나 큰 의미인가, 하는 깨달음도 얻었다. 매일같이 책상에 앉아서 문제집을 죽어라 작살내는 나를 믿는다고 몇 번이나 되뇌시던 담임선생님. 성인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주한 다정한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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