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하나를 줄기차게 쓴다는 것100일 글쓰기 2020. 2. 1. 03:46
#81
하나를 줄기차게 쓴다는 것
강박증이 있다. 뭐든지 분류해야 한다는 것! 아무래도 mbti가 intp인 사람들은(자꾸만 mbti를 언급해서 미안하다) 공감하겠지만,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완벽히 정리를 해놓아야 할 것 같다. 물건을 사기 전에, 그리고 한 종류의 물건이 여러개 생길 때 이 성질은 더욱 심각해진다.
요컨대 이런식이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자질구레한 틴케이스를 몇 개 사모았다. 그런데 막상 화장대에 함께 올려두니 별로 예쁘지가 않다. 가지고 있는 귀걸이를 열심히 분류해서 집어넣어두었는데, 분류체제도 마음에 들지 않고(한 개만 계속 사용하게 된다) 찝찝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악세사리함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데 또 새로운 악세사리함이 생기면 내 틴케이스들은 어떠한 용도로 사용될 것인가.... 에 대한 고뇌를 지금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른 예를 써보자면 향수에 대한 이야기. 수험생때 친구들이 다같이 돈을 모아 사준 안나수이 향수가 하나있고(정말 좋은 향이지만 나를 표현할 정도로 딱! 마음에 드는 향인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고등학생 때 그냥 사보았다가 달달한 마음에 들어서 막 뿌리고 다니는 에뛰드 샤워코롱이 있고 스무살 성년의 기념으로 사본 개인제작 향수가 하나가 있다. 참고로 마지막 향수는 정말 별로인데, 첫번째와 두번째 향수는 이미 너무 질린 상태라 최근에는 마지막 향수만 뿌리고 다닌다. 그래서 개강 기념으로 향수를 하나 살까 하는데, 완전히 마음에 드는 향수를 찾으면 이 세 향수는 어떻게 될까도 고민이고, 새 향수를 샀는데 줄기차게 그것만 뿌리고 다니다가 질려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도 벌써부터 하고 있다.
파운데이션, 메이크업 브러쉬, 다이어리, 펜 등등 여러 제품을 가지고 있는 물건에 한해서는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한다. 즉, 여러개의 물건이 있으면 각각의 용도가 딱! 정해져 있어야 할것만 같은 무의식이 계속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의 물건만 줄기차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이 로망은 어린 시절의 사소한 기억들로부터 생겨났을 게 뻔하다.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청소년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꼭 애정하는 물건이 하나씩 있다. 소공녀에서 세라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인형, 퍼시 잭슨에서 Annabeth가 손에 꼭 쥐고 다니는 나이프와 모자, 주인공 소녀가 이름까지 붙여주는 실버니안 토끼. (이건 딴 소린데 물건을 가장 =사랑스럽게 묘사할 줄 아는 청소년 소설 작가는 재클린 윌슨이다. 이 주인공 소녀가 등장하는 소설은 <the suitcase kid>!)
또 물건을 아끼는, 너무 아껴서 항상 사용하는 친구들에 대한 남모를 동경도 있었다. 초등학교 단짝친구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목걸이라든지, 친했던 엄마친구아들인 오빠가 손에 계속 들고있었던 피카추 인형이라든지.
이 로망을 실현하려면 제대로 아낄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질의 물건을 먼저 사야하고(예전처럼 얼렁뚱땅 가성비만 따지며 쇼핑을 괴로워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건을 사용할 때 생각을 별로 하면 안된다! 결론은 또 언제나처럼 이런 식으로 흘러나간다.
+추상적인 주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경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만 나는 개강을 앞두고 완벽한 잉여가 되어버렸다. 죄책감을 안 느끼며 이 생활을 만끽하고 있으니까 후회를 안할 자신도 있다. 그러니 걱정 마시길!
'100일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3 힙스터 (0) 2020.02.17 #82 한가함 (0) 2020.02.17 #80 사람을 좋아한다 (0) 2020.01.28 #79 생각을 덜하자 (0) 2020.01.16 #78 상상력이 빈약하다 (0) 202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