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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탈리아 3: 피렌체100일 글쓰기 2020. 1. 3. 22:33
#71
이탈리아 3: 피렌체
1.
일단 일반적인 꼰대처럼 또 다른 조언을 하겠다. 제에에에발 관광지 근처의 숙소를 잡아라. 지하철이면 몰라도, 기차로 한 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의 숙소는 절대 아니다. 아무래도 구글 지도에서 나왔던 기차 로고를 지하철로 착각한 것 같은데 미친 짓이었다.
에어비앤비로 잡은 숙소는 피렌체 중심가에서 기차로 한시간을 가야 나오는 교외의 아파트였다.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집주인이 열심히 어필했던 점은 주변 경치가 정말로 예쁘다는 것이었는데 창문은 제대로 안 열리는 데다가 해가 뜨기 전 아침에 출발하고 해가 진 후 밤에 도착을 하는 일정만 반복되어서 구경도 못했다. 침대도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게다가 그 한 시간을 이동하는데 한번 들어가는 기차표의 가격이 5.5유로이다. 그걸 근 여섯 번을 샀으니 얼마나 돈을 낭비한 것인지. 와, 다시 글로 쓰다 보니 과거의 스스로의 멍청함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일정도 정말 힘들었다. 되돌아보기도 싫다. 폰이 없다는 것은, 그리고 그 옆에서 동행인이 폰만 만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화난다. 멍을 때리고 잡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때는 너무나도 심심해서 한 번도 제대로 끝까지 읽는데 성공할리가 없다고 단언한 시집을 끝냈다. 끝냈을 뿐만이 아니라 다시 읽어서 마음에 드는 시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라 조리기구를 여행 중 첫 번째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고, A가 한국에서 챙겨 온 불닭볶음면을 끓여먹었다. 한국음식을 먹으니까 좀 살맛이 나더라. 고작 인스턴트 한 봉지였을 뿐이었는데 정말로.
2.
시발. 아까 내가 에어비앤비 욕을 충분히 한 것 같지만 다시 한번 하겠다. 왜냐하면 이때 피렌체 도심까지 이동하는 기차를 잘못 타서 두오모를 돈까지 내서 예약해놓고 못 갔기 때문이다. 자세히 쓰기도 싫다. 깨닫자마자 내린 역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필름 사진을 잔뜩 찍었다. 찍을 만큼 대단한 것도 없었는데 괜히 이런 것도 여행의 묘미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어서.
사실 기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딴 길로 새는 것도 좋아하고, 모르는 곳을 정처 없이 걸어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A는 울적해 보여서 신경이 쓰였다. 이때도 피렌체 도심까지 가는데 시간이 잔뜩 걸려서 폰도 없는 나는 할 게 없었고, 좋아하는 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아직 1/3 정도 남아있는데,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랬을까, 하며 안쓰럽게 여겨주길. 필사한 시는 박지혜 시인의 <거품섬>.
기대했던 식당은 생각만큼 맛있지 않았고 두오모 통합권을 다 이용하는 게 피곤했다. 베끼오 다리 근처의 괜찮은 젤라토 집을 발견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검은깨 젤라토와 딸기 젤라토. 이 날은 정말 별로였다.
3.
이번에는 제대로 기차를 타서 우피치 미술관에 제시간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중세 미술도, 종교 화도 관심이 없어서 짜증만 잔뜩 날 것 같았는데 귀여운 아기 그림들이 많아서, 그리고 조각상들과 벽화가 꽤 근사해서 마음이 풀렸다.
점심은 정말로 decent 한 현지 고급 음식점에서 해결했다. 피렌체까지 왔으니 티본스테이크를 먹어는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A의 주장에 전적으로 승복한 결과였는데 웃기게도 시킨 메뉴는 라비올리와 염소 스테이크…… 현지인들이 아는(미슐렝 언급까지 있었다) 제대로 된 음식점이었고 맛은 좋았다! 식전주와 애피타이저까지 따로 나왔고, 요리를 끝낼 때마다 친절한 종업원이 일일이 의견을 물었다. 가격을 보고 우울했지만 그래도 현지의 이탈리아 음식 맛집을 제대로 즐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A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가고 싶어 했는데, 다비드 조각상의 진품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피렌체의 필수 관광지이기도 하고 들리는 게 당연하다. 다만 나는 들리고 싶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의사였다. 돈도 아깝고 다비드 상도 싫어하고(흉해….). 웬만하면 A를 배려하다가 (나는 유럽여행의 일부분으로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 것이지만 A는 이탈리아만 여행하는 것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의견을 냈는데 폰이 없어서 둘이 따로 다닐 수가 없었다!!! 폰이 없어서 정말로 좆같다는 걸 제대로 느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크리스마스이브여서 줄이 정말로 길었고 A는 정말 아쉬운 표정으로 가지 말자고 했고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미안했다.
또다시 젤라토 맛집을 하나 찾아갔고 쇼핑을 했다. 기분이 나아지고 싶다? A와 쇼핑을 하면 된다. A는 한국과 비교하면 입이 자동으로 벌어질 만큼 저렴한 러시에 들어가자마자 들떠서 방방 뛰었고 베이커리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디저트를 고르면서 또 신나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피렌체 가죽 시장을 들렀다. 피렌체 가죽시장을 돈을 잔뜩 들고 다시 한번 방문하겠다고 글로 다짐을 남겨본다. 정말로 괜찮은 하얀색 가죽 백팩을 현금을 털어서 사버렸고(알차게 흥정해서 20유로를 깎았다!) A는 밀라노에서부터 노래를 불러대던 가죽 노트를 하나 샀다. 되돌아보면 잘한 소비. 마트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장을 잔뜩 봤고, 집에 돌아와서 희한한 조합으로 저녁을 먹었다. 술을 마시면서 넷플릭스에서 <클라우스>를 봤고 따뜻하고 귀여운 영화에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4.
크리스마스 하루는 숙소에서 죽을 치고 아무것도 안 했다. 나는 노트북을 계속 만지고(넷플릭스와 유튜브와 트위터의 반복) A는 폰을 만지고. 근교라도 한 번 가볼까, 했지만 그것도 귀찮아서 안 했다. 이 날 본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 진정령에 갑자기 꽂혀서 정주행을 시작하려다가 한글자막이 있는 사이트가 외국에서는 재생이 안돼서 fail.
5.
다시 한번 과거의 에어비앤비 선택을 욕하겠다. 도심까지 가는 기차를 놓쳐서 로마로 향하는 기차를 아예 새로 사야 했고, 돈을 50유로 가까이 낭비했다.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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