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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탈리아 2: 베네치아100일 글쓰기 2020. 1. 3. 22:30
#70
이탈리아 2: 베네치아
1.
베네치아는 밤의 치안이 정말 안 좋다고 한다. 밀라노를 오후 늦게까지 구경하고 베네치아로 이동할 생각으로 꽤 늦은 시간의 기차표를 예약해놓았는데 A의 걱정 때문에 이른 시간의 기차표를 다시 샀다.
베네치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의 양은 적었지만 바람이 정말 강해서 우산이 뒤집히고, 손에 들고 있던 엽서와 자석이 가득 담긴 에코백이 젖고, 아 힘들었다. 가자마자 3일짜리 교통권을 샀다. 숙소는 꽤나 골목진 곳에 있어서 찾아가는 게 벅찼다. 저녁을 못 먹어서 근처에서 슈퍼마켓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찾아가는 길에 괜찮은 중국 음식점을 발견해서 가성비 넘치는 저녁을 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파스타 테이크아웃 전문점이었는데, 적당한 크기의 박스에 한 가득 담긴 파스타가 5유로 남짓이었다.
2.
그다음 날에는 부라노 섬과 무라노 섬을 찾아갔다. 사실 베네치아의 유명한 교회와 광장, 그리고 미술관을 먼저 찾아갈 예정이었는데 A가 두 섬을 더 기대한다는 어조로 계속 말을 해서 일정을 바꿨다. 그 두 섬을 찾아가기 전에 숙소 근처에서 간식거리를 사 먹고, 유명한 서점도 찾아가 보고, 뭔가 전문적인 포스가 느껴지는 실링 왁스와 유리펜을 파는 가게에서 돈을 잔뜩 쓰기도 했다. 평소라면 절대 쳐다도 보지 않았을 실링 왁스 한 세트를 나를 위해 하나 샀고, 정말 예쁜 노란색 유리펜 세트를 언니 기념품으로 한 세트 샀다.
빈털털이가 되어서 부라노 섬을 찾아갔다. 부라노 섬은 유리 세공품으로도 유명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뮤비 촬영지와 인스타 사진 촬영 장소로 더 유명하다. 섬에 도착했을 때 비가 슬슬 그치기 시작해서 덕분에 사진을 잔뜩 찍을 수 있었다. 예쁜 색깔의 집이 있으면 민가의 사람이 있는지 눈치를 보다가 재빠르게 달려가 벽에 기대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처음에는 민망해서 소심한 포즈만 취했는데(A는 매우 피곤해 보인다는 평을 해주었다) 나중에는 과감한 포즈도 이것저것 시도하고 그랬다. 부라노 섬에서 무라노 섬으로 이동할 즈음에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날이 제대로 개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각종 원색의 집이 오래된 타일 바닥을 따라서 길게 늘어져있었고, 다리 사이로 배가 지나갔다. 노을은 물을 반짝반짝 물들였다. A는 사진을 신나게 찍었고 서로 뒷모습을 찍어주기도 했다.
무라노 섬은 레이스 공예품으로 유명한데, 정작 괜찮은 퀄리티의 기념품은 별로 보이지 않아서 싱거웠다. 그 대신 유리 공예품을 파는 평범한 기념품샵 하나를 한참 구경했다. 도착하기 전에 하루치 예산을 훨씬 넘는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앞으로는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A는 유리접시에 시선을 뺏겼고 나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짙은 파란색의 유리 귀걸이에 정신이 팔렸다. 10 유로면 싸잖아…. 하면서 사버렸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때 친구와 여행을 해서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까지 뭘 사들였는지 서로 신나게 떠들면서 수상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혼자 이렇게 탕진을 해버렸다면 자책만 하면서 괴로움만을 느꼈을 텐데, A는 물건을 사들이고 그게 얼마나 괜찮은지를 정말 즐겁게 얘기하는 재주가 있다. 덕분에 A와 쇼핑을 하고 나서는 한 번도 울적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
둘 다 피곤해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렸다. 나름 구글 검색을 열심히 해서 추천받은 점심식사를 한 식당은 정말 실망스러웠고, 덕분에 괜찮은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식당을 다시 찾기는 싫다는 게 공통 의견이었다. 마트에서 간단한 술을 좀 사고 안주로 맥너겟과 감자튀김을 씹으며 넷플릭스로 좀비 영화를 하나 봤다.
3.
밤새 비가 꽤 왔는지 숙소 밖으로 나오자 도로가 물로 가득차있었다. 둘 다 당황해서 어버버 하며 호텔 직원에게 사정을 물었다. 두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물이 빠질 거라고 했고 다행히 두 시간 후에 숙소 앞의 물은 다 빠졌지만, 관광지를 찾아가려 길을 걷기 시작하니 더 낮은 길은 아직도 물에 잠겨있어 이동이 힘든 상황이었다.
한 번 봐두었던 작은 바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합의를 보고 향했는데, 한국인이 굉장히 많이 찾아가는 곳인지 한국어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한국어 인사말도 들었다.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또 다른 한국인 일행이 찾아오기도 했다.
음, A는 영어를 원어민 못지않게 잘하고, 나도 나름 한다(스피킹 실력이 괜찮다기 보다는 발음이 양호해서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특이한 경우이지만.) 그래서 현지인 직원에게 영어를 미국인처럼 굉장히 잘한다는 묘한 칭찬을 들었는데 A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글로 풀어내려니 까다로운데, 일단 현지인 직원도 영어 발음이 모범적으로 좋지 않은데 명백히 영어를 더 잘하는 우리에게 칭찬을 하는 자태가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고(동양인이 생긴 것과 다르게 유창한 발음을 구사하니 백인이 놀라움을 느끼는 상황이 아닐까) 이거는 피해 의식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만약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면 이때처럼 친절한 응대를 받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실제로 내가 혼자 유럽을 돌아다닐 때도 그렇고, A와 이탈리아를 돌아다닐 때도 그렇고 인종차별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어쨌거나 식당은 정말로 괜찮았다. 음료와(탄산음료도 칵테일도 가능한 것 같았다) 파스타와 커피 하나가 15유로였는데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마주한 맛있는 파스타였다. 봉골레가 맛있었고 라떼도 정말 부드럽고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높은 점수를 주는 부분은 그냥 현지 식당으로 보이는 허름한 가게 분위기이다. A는 잠깐 시간이 날 때마다 폰을 만져댔고 이때도 역시 인스타와 카카오톡을 열심히 했는데 나는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가지고 있던 노트에 낙서를 했다. 나름 가게의 모습을 그린 낙서인데 그림실력이 끔찍해서 결과물은 초라하다.
베네치아의 광장과 교회는 화려하고 동화적으로 아름다웠다. 가는 길에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파는 가게를 발견한 덕에 나도 이때는 손이 심심하지 않았다. 각각 건물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아, 이곳에서 파리 민박집 룸메이트 두 분을 만나서 정말 신기했다. 어!! 어!!! 하면서 서로를 가리키다가 근황을 대충 나누고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혼자였으면 좀 더 대화를 나누고 같이 돌아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싶다. 그분들도 뮌헨을 들렸길래 한국인들의 여행지란 뻔하구나….. 하는 새삼스럽게 깨닫기도 했다.
기차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자의 조카인데, 각종 화가들을 후원하고 평생 충실하게 작품을 모아온 덕에 작은 미술관에 볼거리가 가득했다. 일단 미술관 자체가 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자연과의 조화도 좋았고, 조각이 정원에 위치해서 물과 다리와 건물이 보이는 주변 경치와 합쳐지면서 하나의 또다른 작품을 만드는 게 너무 좋았다. 필름이 많이 남아있었으면 잔뜩 사진을 찍는건데!! 피카소, 마그리트(유럽에 도착한 이후 거의 처음으로 마주해서 반가웠다! 심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the empire of light였다!), 피카소, 몬드리안 등등. 유럽 여행중 와닿은 작은 미술관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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