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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 191115 #33 카페100일 글쓰기 2019. 11. 19. 07:12
#33
카페
카페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과 함께 살았으며, 지금도 가족과 살고 있고, 나의 방이 따로 있지만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만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주장해보는데,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카페는 하나의 대안이다.
카페 애용자가 된 것은 중학생 이후부터였다. 중학교는 집과 그렇게 멀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때부터 효율적인 동선을 선호했던 나는 학교과 끝나는 시간과 학원이 시작하기 직전의 시간, 그 사이의 붕 뜬 시간 동안 학교 옆에 있는 파스쿠치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파스쿠치는 당연히 그때부터 메뉴가 비쌌다. 음료 하나가 오천 원 언저리, 케이크 하나가 육천 원 언저리. 돈이 없었으면 그냥 아아메 하나만 시켜서 죽치고 앉아있으면 되는 건데 나는 세네 시간이나 앉아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양심을 가지고 꼭 먹을 거 하나, 음료 하나를 시켜서 하루에 만 원이 넘는 돈을 썼다.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라떼, 밀크티, 자몽에이드 등을 시켰고 먹을 거는 그때그때 끌리는 케이크나 파니니를 시켰다. 그런 날이 일주일에 두 번쯤은 있었는데, 중학생 주제에 부르주아적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짓을 계속했다. 같은 파스쿠치에서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두어 달 동안 힘든 영어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하루에 몇백 개씩 단어를 외워오고 (한 단어에 존재하는 모든 뜻을 적어내야 했다!) 문법 개념을 통째로 외워오게 시키는 미친 학원이었는데 그 준비를 파스쿠치에서 했다. 외우고, 받아적고, 미리 시험을 쳐보고.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면 신기하게 학원에 갈 시간이었다. 적당한 소음과 파스쿠치 특유의 고급진 분위기, 그리고 당분은 집중도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그 영어학원을 가기 직전이 아닌, 다른 학원을 가기 직전의 시간들은 카페에서 헛되게 보냈다. 폰을 만지작거리는 게 대부분이었고, 빌리거나 산 소설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이럴 때 카페는 나에게 하나의 위안이었다. 아는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내가 할 일을 해도 되는 숨통이 트이는 장소.
성인이 되고 나서는 할 일이 생겨야 카페에 간다. 집에서는 내가 너무 게을러지기 때문이다. 카페에 가서 할일만 하는 건 아니다. 중간중간에 트위터도 하고, 유튜브도 돌아다녀 보고, 관심이 생기는 주제를 구글링해보기도 하고. 100%의 효율을 뽑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할일이 조금은 진척되어 있으니 괜히 쓰는 돈은 아닌 셈이다. 어릴 때와 달리 음료 하나를 시켜놓고 죽치고 앉아있을 수 있는 뻔뻔함도 생겼다.
카페는 주로 프랜차이즈를 간다. 어렸을 때는 파스쿠치와 이디야였다면, 요즘은 커피빈과 스타벅스. 이 글도 스타벅스에서 쓰고 있다. 파스쿠치는 아직도 애용하고 있다. 내가 한동안 뻘짓을 하며 죽치고 앉아있어도 카페의 직원이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는가(이 조건 때문에 복층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와이파이가 빵빵한가, 카페에서 편하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화장실이 바로 근처에 있는가가 카페를 갈 때 따지는 조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개인 카페는 거의 없다. 개인 카페의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주인장의 개성이 묻어 나오는 메뉴를 모두 좋아하지만 막상 들리는 일은 적은 이유이다.
지금도 카페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다. 한 커플은 서로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수다를 떨고 있고, 한 할머니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 여성 분은 노트북을 펼쳐놓고 업무를 보고 있다. 명백히 따져보자면 혼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카페 특유의 분위기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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