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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를 읽고서재 2019. 11. 4. 02:35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작가: 이다혜
출판사: 예담
여행을 왜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다. 여행의 의미가 과장됐다고 비판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여행을 다니는 집착을 못 이겨내는 사람이다. 올해 초에 읽었던 에세이인데, 하나의 긴 여행을 앞두고 다시 읽었고, 사무치게 좋았다.
1.
그냥 떠나고 싶어서 핑계를 만든다. 나는 너무 지쳤어. 잠깐 여기서 끊어갈 타이밍이라고 느낀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고 싶어졌어.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면 무엇이 보일까 궁금해.
신발이 발에 너무 잘맞아서, 여권에 빈칸이 많아서, 경주에 가본 지 오래되어서..... pg.16
지난 여행의 기억은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빈의 거리를 누비며 찍은 영상, 더워서 쓰러질 것 같은 한여름의 낮 청도의 거리에서 사 먹은 볶음밥, 프라하의 야경, 미국 서부의 딸기 바나나 스무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고, 기억 저편으로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여행은 이런 행복한 순간이 있었으니, 또 이런 행복한 순간이 생길 수 있으니 일상을 버텨나가야 한다고 나를 붙잡아준다. 낯선 곳으로의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나면 또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다. 호스텔을 예약하고, 기차표를 예매하고, 점점 가벼워지는 통장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도 이 지긋지긋한 일상과 집을 뛰쳐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나는 행복해진다.
2.
인터넷 블로그에 있는 여행기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출발'이다. 공항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탑승수속을 밟고, 면세점에 들르고, 비행기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호시탐탐 훔쳐보고, 기내식을 먹고, 기내식에 대해 불평하고...... 천편 일률적이지만 나는 그 순간에 여행의 절정을 느껴버리니까 그 순간을 쓴 이야기들이 좋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순간에 오늘 무슨무슨 이야기를 해야지, 무슨무슨 이야기를 들어야지 하며 기대에 가득 차는 것처럼. 그 도시가 들려줄 이야기를 한가득 기대하고 있는 상태. pg.116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두려워하지말고, 설레어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긍정적인 감정으로 뇌를 한가득 채우고, 허리를 피고 당당히 걸어 나가자고. 나는 성인이고, 나는 내 의지로 이곳에 와있고, 나에게는 즐거운 경험이 가득할 거니까. 공항 안에서, 경유지에서, 우버에서 기죽어있지 말고 시선을 바로 하자고.
3.
책을 아껴둔다, 는 감각이 있다. 내미 있어 보이는 책을 일부로 읽지 않고 아껴둔다. 여행 가서 읽기 위해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거나, 재미있을 것 같아 보이고 내가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의 추천이 있는 책이다.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을 굳이 뜸 들여 읽었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pg. 140
이번 여름 동유럽 여행에서 읽은 한 권의 책에 관한 이야기. 천명관의 <고래>.
프라하로 가는 여정은 러시아의 한 도시에서의 경유를 포함했는데, 칠월인데도 서늘했던 러시아의 공항에서 책을 펼쳐 들었고, 정신을 못 차리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인물의 묘사로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시간을 뛰어넘어 한 도시의 성장과 몰락, 수많은 인간들의 엉킴을 거침없이 풀어나갔고, 나는 반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러시아의 공항에서 웅크려서 읽다가, 좁아터진 비행기 좌석에서 읽다가, 다섯 시간 정도의 비행이 끝나기 전에 책은 끝났다. 촌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빨간색의 표지를 볼 때면 서늘한 공기와 낯선 언어들, 무료해 보이는 주위 사람들의 얼굴과 그 와중에 혼이 빠지게 책에 몰입해있는 나 자신에 취해있던 순간. 아직 그런 것들을 소중히 보관해두고 싶어서 다시 그 책을 펼쳐보고 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는 실물 책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전자책에 만족해야겠지만 슬슬 추천 책 목록을 뒤지며 장바구니에 책을 담을 생각을 하니 <고래>와 러시아가 생각나고 기대가 쌓인다.
4.
여행을 좋아하는 이뉴는, 어디로 떠나든 많이 걷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하루 한 시간도 걷지 않는 날이 허다한데, 여행을 가면 일단 세 시간에 한 번 앉을 뿐으로 거의 걷게 되니 몸이 훨씬 편해진다는 느낌으로 귀갓길에 오른다. (...)
매 순간 묻지 않아도 다음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짜인 일과에서 벗어나, 일단 계속 걷는다.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가. 평소라면 다음 일을 하기 위해 옆으로 치워두었던 질문들이 날개를 편다. pg. 226-227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지만, 걷는 행위를 무척 좋아한다. 걷는 걸 좋아한다고 부끄러워한다니, 이해가 안 가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 이유는 그 걷는 행위를 위해서 정말로 비효율적인 일정을 짜기 때문이다. 일부로 몇 정거장 먼저 버스에서 내려 걷는 것은 기본이고, 최근에는 걸어서 거의 사오십분이 걸리는 길을 과외가 끝나고 나서 걸어낸다. 중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살 게 없는데도 굳이, 한 시간은 꼬박 걸어야 하는 길을 걸어 큰 서점에 갔다 오고, 구립 도서관을 걸어갔다 오고. 올해 초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잘못된 정거장에 내리겠다는 것을 깨닫고도 일부로 그 정거장에 내려, 등산에 가까운 여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걷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나에게 해야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내년이면 이런 일상을 못 누릴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그리워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원하지 않더라도 미친 듯이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남들에게는 번거로울지라도, 나에게는 설레기만 한다. 걸으면서 스칠 낯선 언어와 인종, 거리, 걸으면서 피어오를 망상과 다짐, 아이디어까지. 마지막 걷기라는 심정으로 흠뻑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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