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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월별 요약일기 2020. 1. 1. 00:00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서 체크인센터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다. 이탈리아를 같이 돌아다닌 친구는 벌써 체크인을 성공하고 라운지에 들어갔는데 (무려 비즈니스를 탄단다... 부러워라) 덩그러니 공항의 의자에 남겨져있는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올해 월별로 뭘 했는지를 적어보겠다. 한국 시간으로 정오가 되자마자 딱! 업로드하는 게 목표이다.
100일 글쓰기를 친구와 여행하면서 부터 손도 못 대고 있어서 죄책감이 들지만 혼자 있을 때만 글을 쓸 기분이 나는 걸요....
1월:
수능이 끝나고 한참 잉여로 지낼 때... 뭘 했는지 기억도 안난다. 12월에는 각종 수술을 받고 집에 드러누워 있었던 거 라도 기억나는데. 아, 1월 초에 원서를 썼다. 가군은 원래 가고 싶었던 과를 지르고, 다군은 넣고 싶은 대학과 과가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길래 생각에도 없던 안정권의 한의대를 썼다. 문제는 나군이었다. 원래 목표는 가군, 나군, 다군을 생각해둔 과로 통일하는 거였는데 그러기에는 내 성적이 너무 아까웠다. K대를 쓸지, Y대를 쓸지. 그나마 관심이 있는 화학과를 쓸지 취직과 자존심을 생각해서 공대를 쓸지 한참을 어머니와 티격 대다가 결국 Y대의 공대를 썼다. 어벤저스를 보고 토니 스타크 뽕에 차있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그냥 뒹굴거리고, 한참을 인터넷을 하고. 생각보다 사람과 많이 만나지 못했다. 같이 재수 아닌 재수학원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모두 수능을 망쳐서 울적해 보였고, 다른 친구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2월:
2월 초였나 중순이었나 대학결과가 나왔다. 한의대는 부분 장학금 딸려서 합격이었고 Y 대는 대기번호 1번을 받았는데(충원율이 100%를 넘는 특이한 곳이기 때문에 그냥 합격이라는 뜻이다) S 대는 불합격이었다. 완전 아슬아슬한 점수대였는데도 나는 내가 붙을 줄 알았기에 충격이었다. S 대는 콧대도 진짜 높아서 대기번호도 안 알려주더라. 어머니가 무당한테 가서 내가 관악의 문턱도 못 밟을 거라는 예언을 받은 얘기까지 해주었고, 나는 빠르게 체념했다.
그렇게 Y대의 1차 추합 결과까지 나오고 등록금을 내고, 영어시험을 보러 신촌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학교생활에 대한 로망은 빠르게 식어있었는데, 에타는 열심히 들여다봤다. 영어시험을 보고 에타를 뒤지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으, 더럽게 추웠다. 꼴에 성인이라고 슬랙스와 셔츠를 입고 코트까지 걸쳤는데 얼어 뒤지는 줄 알았다) 에타에 내가 속한 과의 오티가 시작했다는 글이 갑자기 올라와서 아, 나는 이미 아싸 구나, 하면서 낄낄대면서 그냥 집으로 계속 갔다.
집에 돌아와서 에타에서 보이는 과 동기들에게 어떻게 하면 과 단톡방에 초대되냐, 나는 무슨 반이냐, 오티 지금 가도 되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언니가 옆에서 S대 추합 결과가 나왔다고 툭 말을 걸었다. 나 안 붙었어, 글렀어, 하면서 그냥 무시하는데 언니는 끈질기게 내 원서 번호를 물었다. 합격이었다.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다. Y대 에타에 S대 붙었다는 자랑 글을 올렸고 (미쳤었다... 봐달라) 어머니한테 바로 전화를 걸어서 나 붙었어!!!! 하고 비명을 질렀고 (뒤에서는 동료분들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가족끼리 외식을 했다. 그러고 나서 계속 학교 자랑을 하며 집에 붙어있었다. 학교에서 수학시험과(기초반 당첨됨) 영어시험을 봤다. 새터는 재밌었고 오티는 재미없었다.
3월:
학교를 2주 다니다가 때려쳤다.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변명을 해보겠다. 내 돈을 퍼부어서 정신과를 찾아갔다. 과외 하나를 부탁받아서 시작했는데 그것도 힘들었다.
4월:
과외 하나를 더 소개받았다. 휴학을 부모에게는 비밀로 하고 저질렀는데, 정신과 상담을 받고 홧김에 고백해버렸다. 원래 국어만 가르쳐주기로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영어도 가르쳐주게 되었다. 과외가 졸지에 세 개가 돼버렸고, 역시 스트레스를 졸라게 받았다. 동아리 모임을 나갔는데 재밌었다. 부모랑 미친 듯이 싸웠다.
5월:
진짜 뭐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꾸준히 과외와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화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랬을 것이다. 인터넷 중독이었는데 그렇다고 끈질기게 뭘 깊게 파지도 않았다. 이 블로그 일기장에 그때의 우울감이 가득 찬 글들이 꽤 있을텐데, 아직은 들여다보기 싫다.
6월:
이때도 뭐했는지 기억이 안나네. 그냥 체념의 상태 그대로 살아갔다. 그래도 휴학을 결심했을 때는 쉬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해보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의미 없는 깨달음을 얻고 무기력하게 먹고 일했다. 일 때문에 트러블도 있었다. 내가 과외에 계속 늦고 수업을 미루고 그랬는데 어머니 한분에게 크게 혼났다. 그 후로는 정신을 차기로 부지런하게 과외를 다녔다.
7월:
체념은 당연히 마음에 평온을 불러온다. 쉬어도 된다는 상담선생님의 말에 많이 위로를 받았다. 7월이 되자마자 친구와 청도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고나서 많이 걷고, 책을 좀 읽고. 아, 아이돌 덕질을 진심으로 꾸준히 열정적으로 했다. 무려 공방까지 뛰어봤다. 잘 지내냐 내 새끼들.... 7월 말에 동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8월:
8월 초에 동유럽에서 돌아왔다. 재밌었다. 역시 과외 보충 때문에 꽤 바빴다. (이때까지 계속 과외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9월:
생일이 있었다. 다음 해를 부모님과 의논하기 시작했다. 자취를 할지, 차를 타고 다닐지. 돈 때문에 힘들었다. 상담을 가면 항상 돈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비행기 티켓을 사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셨고 유럽여행을 결정했다. 웃긴 게 이때부터는 여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준비해야 되는데, 준비해야 되는데, 하면서 정작 실행하는 건 없어서. 이번 해는 나에 대한 기대와 실행력, 대인관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많은 것을 스스로 배우려고 애를 썼던 해였다.
10월:
역시 과외, 여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음. 100일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름 주제를 정해서 괜찮은 글을 써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일기를 쓰는 꼴로 전락했다. 그래도 그러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분류와 결론을 내는 것에 유난히 집착한다. 어떻게든 나의 고민을 제대로 분류해서 정리하고, 결론을 내서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 그렇게 글을 꾸준히 썼는데 그러면서 내가 이때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현실에서 숨으려고 했던 이유와 앞으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목표로 잡아야 계속 살 의욕이 나겠는가를 깨달았다.
11월:
제자들의 수능이 끝나고 (연락이 없는 것을 봐서는 결과는 좋지 않은 듯 하다. 슬퍼라) 내 새끼들의 콘서트를 갔다. 콘서트를 갔다 오자마자 출국날짜가 바짝 다가왔는데 결국 제대로 준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비행기에 허겁지겁 올라탔다. 영국의 런던, 스페인의 마드리드, 그라나다, 바르셀로나를 돌아다님.
12월:
계속 혼자 여행. 크리스마스 주에 친구와 만나서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 아, 이탈리아부터는 많이 지친 상태로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쇼핑도 많이 하고 필수 여행지도 마음대로 빼먹고. 바르셀로나와 프랑스의 니스, 파리, 독일의 베를린, 뮌헨, 그리고 이탈리아의 밀라노, 베니스, 피렌체, 그리고 로마.
힘들었다. 20대의 시작을 고작 이렇게 보내도 괜찮을까 하는 고민도 계속 했고, 편하지 못하고 휴식기를 보낸 것 같아서 찝찝하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이 다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줄 테니까. 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비행기 안에서 새해를 맞이할 것이고, 스물한 살이 된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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