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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191216 #64 모든 것을 잡을 수는 없어100일 글쓰기 2019. 12. 17. 05:31
#64
모든 것을 잡을 수는 없어
1.
"모든 것을 잡을 수는 없어."
그는 말했다. 나는 창틀에 몸을 기댄 채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겨울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건드렸다. 뒤늦게 그의 말에 대충 반응을 했다. 으응, 그래.
그는 진지했다. 눈동자는 초점이 나간 상태였고, 유일한 청자인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이 분명했다. 불분명하고 근본적인 문장을 연달아 내뱉었다.
*
2.
빨래를 하고 있다. 저번 호텔에서 빨래를 한 번 하려니 거의 10유로를 내야 해서 다음 호스텔에 laundry room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경험상 프런트 직원에게 따로 부탁해야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따로 방과 기계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가격이 훨씬 싸더라) 오늘까지 빨래를 쌓아놓았다. 덕분에 수건, 속옷, 잠옷까지 모두 건조기에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고 나는 약 삼십 분 정도를 더 기다려야 내 수건과 잠옷을 가지고 샤워를 할 수 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좀, 아무도 없는 공간에 가서 쳐져 있고 싶다. 이 말을 하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지만, 화면을 들여다보는 게 지겹다. 노트북 화면, 아이폰 화면...... 할 게 없으니 끊임없이 유튜브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포스타입을 뒤지고, 트위터를 뒤지고 있는데 좀 생산적인 걸 하고 싶다. 그나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기분이 좀 낫다. 위에 나열한 것들보다 훨씬 생산적이니까.
3.
전에도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지만 유튜브에서 브이로그를 찾아서 연달아 보는 게 취미다. 지금도 그 짓을 하고 있는데, 보통 보는 유튜버들은 열 명 내외로 정해져 있고, 가끔씩 꽂히는 사람 한두 명의 영상을 통째로 다시 정주행 하는 식이다. 얼마 전까지는 영상을 틀어놓고 딴짓을 많이 했다- 요리를 한다든지, 밥을 먹는다든지, 책을 훑는다든지 다른 짓을 꼭 하면서 배경음악처럼 영상을 틀어놓았다. 나름 효율적으로 살고 싶다고 그랬던 것일 텐데, 역시 멀티태스킹은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내 기억력이 증명한다. 그렇게 슬쩍슬쩍 봤던 브이로그들은 지금 다시 보면 처음 보는 듯하다.
브이로그를 찍는 유튜버들은 대부분 부지런하다. 특히 전업 유튜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취미로 유튜브에 일상 브이로그를 올리는 사람들! 학업도 알바도 시간관리도 자기 관리로 쉬지 않고 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는데, 거기다가 편집까지 한다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살아가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살아가는 나 자신을 떠올려본다. 학점을 챙기고, 알바를 하고, 스케줄러를 빽빽하게 쓰고, 친구들을 만나고. 글을 쓰고(글을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하기는 싫다). 예전과는 다르게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면서 프로토 테스트 같은 느낌으로 브이로그를 본다는 뜻이다. 내년은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 자신이 생겼다. 확실히.
4.
"모든 것을 잡을 수 없어"는 너무 많은 것을 잡으려다가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정보와 다짐을 한가득 머릿속에 쌓아놓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것. 발버둥을 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정말로 나에게 필수적인 것은 몇 번이고 다시금 찾아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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