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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191130 #48 그라나다!100일 글쓰기 2019. 12. 1. 05:56
#48
그라나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그라나다. 날씨가 더럽게 좋아서 행복하다. 하늘색으로 가득한 하늘과 쨍쨍한 햇빛, 시원한 공기와 활기찬 거리. 살 것 같다.
알람브라 궁전은 아름다웠다. 아홉 시 삼십 분에 나스리드 궁전 입장을 예약한지라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길을 나섰는데 최고였다. 어떤 문화인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무슨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 어떤 건축양식이 사용되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딱히 당장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시원한 공기와 고즈넉한 분위기, 아름다운 궁전이 좋았고 그 당시의 상황을 ‘좋다’ ‘아름답다’ ‘즐겁다’ 정도의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몇십 장씩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고, 말도 안 되게 정교한 장식과 조각이 새겨져 있는 천장을 목이 빠지게 쳐다봤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피아노 OST를 들으며 천천히 주위의 관광객들과 걸었다. 나스리드 궁전에 딸려있는 정원을 궁전을 빠져나가는 출구로 착각해서 약 삼십 분 동안 정원을 헤맸지만 헤매면서도 정원과 파란 하늘이 눈에 미적으로 만족스럽게 여겨져서 사진을 또 미친 듯이 찍었다.
박물관은 따로 들리지 않았고 오디오가이드를 뒤늦게 신청해서 목에 건후 알까 자바(군사시설로 사용된 성채이다)와 제네랄 리페(정원!)를 돌아다녔다. 9유로나 했지만 녹음된 오디오의 한국어가 어설펐고 걸음을 멈추면서 설명을 듣는 과정이 번거로워서 결국은 제기능을 하지 못한 채 목에만 달랑달랑 걸쳐져 있었다. 뭐, 사진을 찍었을 때 목에 매달려있는 게 나름 간지 나는 분위기를 연출해주었기 때문에 헛된 소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알까자바에서는 번거롭고 힘겹게 셀카봉을 주섬주섬 꺼내서 셀카를(!) 계속 찍었다. 인스타 업로드용으로 100% 만족스러운 작품까지는 못 뽑아냈지만 80% 정도 만족스러운 사진 하나를 인스타 피드에 추가했다. 제너랄리페와 알까자바, 나스리드 궁전 셋다 한적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흠뻑 지니고 있는 관광지였다.
이사벨 광장으로 직접 걸어가서 유명한 츄러스를 사 먹었다. 마드리드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는데, 정말로 맛이 더 좋았다기보다는 따로 카푸치노를 시켜서 느끼함을 중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게 느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직원들도 친절했다. 배를 채우고 나서는 알바이신 지구를 돌아다녔다. 원래 계획은 성 니콜라스 전망대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것이었지만, 구글 지도에 목적지를 잘못 입력해 엉뚱한 곳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런데 그곳도 경치가 만만치 않게 좋아서(눈이 살포시 쌓인 정체모를 산과 알람브라 궁전, 그리고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재킷과 목도리를 벗고 또 사진을 신나게 찍었다.
올라오는 과정에서 알바이신 지구의 골목 사이사이를 아이유의 블루밍을 반복해서 들으며 돌아다녔는데, 깨달은 것은 골목을 들어가고 빠져나가며 그곳의 거리와 건물, 사람들을 찍는 것을 내가 퍽 좋아한다는 것이다. 마드리드에서도, 런던에서도 골목을 들어가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폰을 꺼내서 소실점에 구도를 맞춰서 사진을 잔뜩 찍었다. 영상으로 순간을 남기는 것도 좋아한다. 사진보다는 영상이 내가 지금 담고싶어하는 순간을 더 현실과 가깝게 보존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찾아나가게 되는 게 신기하다.
칼데레리아 누에바 거리, 알카이 세리아 시장은 생각보다는 초라한 마켓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하나같이 찍어낸 듯한 기념품들. 어설프게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 현지에서 질좋은 수공예품을 사고 싶었는데. 입이 튀어나왔다. 자석 하나를 누에바 거리에서, 귀걸이 하나를 알카이 세리아 시장에서 샀다.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도, 웃기게도 다섯 시도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할 건 많고, 숙소는 한적하다. 아 이걸 안 썼구나. 어제는 팔 인용 숙소에 혼자서 잠을 청했다. 졸라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방금 숙소로 돌아와 보니 두세 명이 체크인을 했다. 근데 또 내 방에는 나밖에 없음. 아싸.
그리고 지금, 밤의 호스텔에서
저녁식사와 내일 기차에서 먹을 간식을 사러 까르푸에 들렀다. 프링글스와 초콜렛, 그리고 저녁으로 먹을 수상한 샌드위치를 사고 호스텔 1층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았다. 근데 캔을 따 보니까 콜라가 아니라 맥주였음.(아니 근데 이 나라는 캔맥주를 자판기로 팔아도 되는 건가??? 미성년자가 먹으면 어떡하라고??? 애초에 나도 유럽에서는 술 마시면 안 되는 나이로 알고 있는데????) 캔 색깔이 빨간색으로 똑같아서 내가 착각해서 뽑아버렸던 것이다. 샌드위치는 더럽게 맛없어서 몇 입 못먹고 버려버렸고, 결국 저녁을 맥주 한 캔과 프링글스로 때워야 했다.
문제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느라 좀 취함. 내가 취하는 건 세 단계가 있는데, 다행히 지금은 첫단계밖에 가지 않았다. 술을 꽤 잘하는 인간이라고 자부했는데, 한동안 안 마셨더니(안 마신 이유: 1. 돈 없음 2. 술이 맛없어서 애초에 혼자서는 잘 안 마심 3. 술 같이 마실 사람 없음 4. 술 마실 일 없음 5. 꼴에 건강 생각한다고 한동안 건강식으로 챙겨 먹고 삶) 약해졌나? 잠이 쏟아지고 (근데 내일 체크아웃 좀 늦게 할 거라 늦게 자려고 했는데 젠장) 이빨을 서로 부딪치게 했을 때 감각이 묘하고 살짝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정신이 알딸딸한 지금 타이핑을 하는 이유는 내 목도리를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런던 여행 마지막 날에 그리니치 마켓에서 15파운드를 주고 산 묘한 하늘색의 울 목도리인데, 내 피부랑 잘 어울려서 첫눈에 반해서 사버린 것이다.(나는 퍼스널 컬러가 여름 뮤트인데, 목도리는 차가운 톤의 하늘색이다.) 정말 예쁘다.
한국에서 외투를 두개 챙겨 왔다. 둘 다 빈티지 제품으로, 하나는 짙은 남색의 재킷이고 하나는 황토색 코트인데 하나는 쿨톤, 하나는 웜톤을 생각하고 챙겨 왔다. 함께 챙겨 온 목도리는 칙칙한 쥐색인데, 부모님께서 따로 챙겨준 것으로 우리 집에 어떤 경유로 들어오게 됐는지가 궁금한 명품 브랜드 제품이다. 목도리가 너무 무난하고 얇아서 고민이었다. 그리니치 마켓에서 두텁고 알록달록한 목도리를 보고 무리해서 지갑을 열었다.
목도리는 쿨한 하늘색이기 때문에 황토색 코트와는 안 어울리고, 남색 자켓 위에 입을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둘의 색은 서로 잘 어울릴지언정 재질은 상극이라는 것이다. 목도리에서 계속 나오는 솜??? 먼지??? 실밥??? 정체를 모를 무언가가 자켓에 계속 들러붙는다. 목도리를 하고 몇시간이 지나서 자켓을 살펴보면 고양이털과 비슷한 그것이 자켓 전체에 잔뜩 들러붙어 있다. 맙소사. 나는 목도리에게 고양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주었다. 처음에나 짜증나고 신경쓰였지, 지금은 또 나름 적응해서 입고다니는 동안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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