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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글쓰기: 191015 #10 손글씨와 노트북100일 글쓰기 2019. 10. 18. 01:05
#10
손글씨와 노트북
화면에 뜨는 텍스트가 좋다. 정리되어있고, 어떻게든 쓰일 하나의 도구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손글씨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필체가 일정한 작은 손글씨가 종이 위에 다닥다닥 새겨진 광경은 좋다. 수능 공부를 한창 할 때 심적으로 가장 많이 의지했던 것은 빽빽하게 손글씨로 공부량을 기록하고 작고 큰 목표들을 끄적이던 일이었다. 그렇게 글자로 가득 찬 플래서 한 면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뿌듯함과 안정감을 느끼고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쓰여진 글이 아니라, 단순히 쓰는 행위에 대하여 말하자면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타이핑으로 글을 쓰는 것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처음 손으로 글씨를 쓰는 방법을 배웠을 때 잘못 배웠던 것인지, 펜 또는 연필을 쥘 때 힘을 과도하게 주는 게 문제다. 때문에 글씨를 몇 분만 연달아서 써도 금방 쥐가 나고, 손가락은 벌게진다. 펜을 눌러서 뭔가를 쓸 때 종이에 펜 자국이 항상 깊게 나서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는 것도 덤이다. 손이 아려서 뭔가를 오랫동안 쓰지를 못하니, 효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특이한 것은 알파벳을 쓸 때는 한글을 쓸 때보다 힘이 덜 들어간다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알파벳은 한글과 다르게 글자가 곡선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가장 좋은 것은 노트북으로 타이핑해서 글을 쓰는 것. 따로 키보드를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참 글이 잘 써질 때 귀에 들리는 리듬감 있는 타이핑소리를 애정한다. 스마트폰으로 쓰는 글은 애매하다. "갤럭시를 쓸 때는 천지인 자판이 있어서 나름 애용했는데, 아이폰은 천지인 자판이 없어서 괴롭다."라고 쓴 후,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네이버검색창에 아이폰 천지인을 검색해보았다.. 파워블로거의 도움으로 아이폰에도 천지인 자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천지인 없이 오타를 남발하던 지난 3개월이여.... 폰 화면을 터치해서 글을 쓸 때는 문체가 이상하게 가볍게 나온다. 손가락이 예민하지 않아 오타가 넘쳐나는 것도 별로다. 그래도 손으로 쓰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결론이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설을 사랑해온 나는 언젠가부터 소설을 써내는 나자신을 상상하며 죽고 싶은 날들을 버텨왔다. 웃긴 사실은, 올해가 되기 전까지 소설을 두 페이지 이상은 써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도 끝까지 짜 본 적이 없다. 뭐든 해보다가 닥치면 그 준비 단계가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걱정을 하고 하던 것을 멈춰버리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일단 플롯을 짜다보면, 혹은 인물을 설정하다 보면 막히는 부분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론서를 일단 찾아본다. 찾아보더라도 끝까지 내용을 읽는 데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론서를 다 읽고 쓰기 시작해야지 뭐'라고 일단 미룬 뒤 이론서를 읽을 의욕을 잃어버린다. 플롯 없이 소설을 무작정 써 볼 때도 있었다. 위에 쓴 것처럼, 두 장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 수학 노트에다, 국어 노트에다 한 시간 남짓 소설을 몇 바닥 써보다 뜯어내기만도 몇 번이었다. 싸지른 글이 어떻게 봐도 부자연스럽고, 인물들의 행동은 개연성이 없고..... 계속 써나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몇 년 동안 결과물을 아무것도 뱉어내지 못한 나 자신을 가차 없이 혐오했다. 결국은 의지의 부재라고 한탄해왔다.
대학에 붙자마자 부모님에게 부탁한 것은 노트북이었다. 노트북은 초등학생 때부터 갖고싶어했던 물건들 중 항상 최우선 순위였는데, 십 년 동안 마련을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부모님은 다른 일들에 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시다가도 이상하게 인터넷과 관련된 일들에서는 엄격하셨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2G 폰만 사용했고, 어쩌다가 스마트폰을 얻고 나서도 인터넷 사용시간을 통제받아야 했다. 피시방은 꿈도 못 꿨다. 노트북으로 제대로 인터넷을 할 기회는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두세 시간 이내로 끝내라고 제한받고는 했다. 노트북은 무척 비쌌고, 푼돈인 내 용돈으로 마련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하루 종일 인터넷을 해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얻었고(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있으신 부모님이시다)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주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엘지 노트북은 투박하고 커다랗고 무겁지만 기능이 좋다. 들고 다니기에는 무리라는 걸 깨닫고 월급을 모아서 어제 중고 맥북에어를 주문했는데, 요지는 성인이 되고 나서는 노트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트북으로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우울증이 바람처럼 밀려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나서야 나는 글을 쓰고 싶어했지, 소설을 쓰고 싶어 했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물들였다. 시작은 짧은 일기였다. 일기는 점점 분량이 많아졌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독서록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으로 소설을 쓰면서, 아니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글은 생각보다 쓰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힘들게 필기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자국을 남기는 행위가 어려워서 몇 년 동안 나는 글을 계속 써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워드 프로세서의 발명을 찬양하는 20세기 인간이 된 기분이지만, 모두가 알 사실을 나열해보자면,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게 편하다. 몇 번을 읽으면서 수정을 할 수 있고,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을 깔끔하게 날릴 수 있다. 내 필체가 아닌 일정한 폰트로 글이 표현되었기 때문에 내 글을 더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손이, 손목이, 목이 아프지 않았다.
내가 십대 시절 글을 거의 쓰지 못한 이유는 의지의 부재가 아닌 도구의 부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못 썼던 나의 몇 년이 합당했던 것인가,라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글을 쓰려고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그때도 글을 본격적으로 써보려면 노트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있었다. 그리고 노트북은 중고로 잘 찾아보면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글이 쓰고 싶다,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나의 입장을 전달했으면 둘은 나에게 방해받지 않고 노트북으로 글을 쓸 시간을 주셨을 수도 있다. 하다 못해 차선책인 스마트폰이 생긴 후에는 그걸로 글을 쓸 수도 있었겠지. 나는 어느 것도 최선을 다해서 시도해 보지 않았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나에게 노트북이 있었다면 뭔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너무 잔인했던 통제가 조금은 덜했다면.
개인적이고 비논리적인 넋두리였다.
(PS: 2일치 글쓰기가 밀렸는데 몰아서 쓸지, 아니면 날짜를 무시하고 뻔뻔하게 갈지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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