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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프루트 정글> 리타 메이 브라운서재 2019. 10. 11. 21:03
루비 프루트 정글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
출판사: 큐큐
흔히 초보 작가들이 작법서에서 듣는 조언들 중 하나는 소설의 주인공에 자신을 너무 반영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이 아니기 때문이고, 독자들은 귀신같이 그게 작가 본인의 이야기임을 눈치채고 흥미를 잃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런 소설을 읽고 나면 역시 어떻게 보면 소설은 작가의 일부가 어떻게든 반영이 되어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루비프루트 정글>의 주인공인 몰리는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에 분신과도 같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 능력 있는 아이 캐릭터에 환장한 나는(이제 편하게 인정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책 역시 재밌게 읽었다. 그러나 재밌게 읽은 것과는 별개로, 주인공 몰리의 행보에, 생각에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몰리는 1900대 중반 미국에서 태어나고 남부에서 자란 레즈비언인데, 그러한 시대에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았고 인정했다는 것 외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중요한 순간에서는 그녀가 결코 본인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페이와의 관계를 대학교에 들켜서 기숙사에서 쫓겨날 지경이 되었을 때, 몰리를 추궁하는 같은 학교 학생에게 그녀는 본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다. 폴리나와 사랑에 빠지고 나서는 그녀와 관계를 진전시키기 전에 커밍아웃을 한다.
"제가 레즈비언이거든요."
"너? 하지만 넌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겼는데. 몰리, 장난치지 마. 네가 레즈비언일 리가 없어. 농담이지? 네가 그런 거였으면 내가 알았을 거야."
"마님, 저는 순수혈통의 진짜 레즈비언입니다. 제 생김새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아는 레즈비언들은 거의 다 보통 여자랑 똑같이 생겼습니다만, 마님께서 트럭 운전수가 당기신다면 제가 딱 좋은 곳으로 모셔봅지요." 나는 그녀를 꼭 한번 그런 식으로 비꼬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었다. pg. 272
몰리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여자가'를 말 끝마다 달고 사는 계모 캐리에 맞서 사회가 정한 관습들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아 버리며, 주지사 또는 대통령이 될 거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아버지 칼이 몰리를 두둔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칼은 직장에서 딸이 진짜 주지사가 될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똑똑한 몰리를 기어코 대학에 보내겠다고 캐리에 맞서 준다. 몰리는 수석으로 영화학교를 졸업하는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그녀가 '여성'이 아닌 '영화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장면은 책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굽히면 삶이 편하지 않겠냐는 타박에 몰리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고, 자신만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본인은 끝까지 그걸 지켜낼 것이라고 대답한다.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아, 이 책의 제목이 <루비프루트 정글>인 이유는 몰리가 여성들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가 루비프루트 정글이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도 제목은 소설 여러 군데 언급이 된다. 몰리의 친모의 이름이 루비였으며, 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자몽(루비프루트)으로 성기가 맞아야 성적으로 흥분하는 남자에게 자몽을 던지기도 한다. 오히려 최근 소설들은 이런 장치를 안 쓰는 것 같은데 나는 이런 세심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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