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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서재 2019. 9. 10. 02:10
달의 궁전
작가: 폴 오스터
출판사: 열린 책들
드디어 읽은!(이 책을 추천받은 시기는 무려 3년 전이다!) 달의 궁전.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 삼촌에 대한 사실, 그리고 자라나면서 겪은 일을 늘어놓으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주인공은 삼촌의 죽음 이후 삶의 극단을 향하며 금전이 바닥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사색을 하고, 삼촌이 남겨놓은 책을 읽다가 결국 길바닥에 나앉게 되고 만다. 이 소설은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현실로 차차 돌아온 후, 대학교 취업 상담실에서 노인의 말벗을 해주는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노인의 이름은 에핑이었다.
에핑은 눈이 안보이고 걸을 수 없는 노인이었고, 곧 주인공에게 영문을 모를 일들을 시킨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해서 전달해 주라는 것, 미술관으로 가 죽은 친구의 작품을 아주 오랫동안 보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라는 등등.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자신의 사망 기사와 자서전을 써달라는 부탁을 주인공에게 건넨다.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뜬금없는 고백으로부터 뻗어져나온다.
그는 이미 죽어있다고.
『나는 죽었어. 사람들은 산 사람의 사망 기사를 쓰지는 않아. 안 그런가? 그러니까 나는 죽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사람들이 나를 죽었다고 생각했지.』
『그러면 어르신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나요?』
『그래, 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지.』
『그러면 제가 어째서 어르신 이름을 못 들어 봤을까요?』
『나는 늘 다른 이름을 썼으니까. 내가 죽은 뒤에는 그 이름을 버렸거든.』
에핑은 그렇게 매혹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줄줄 뱉어내고, 주인공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받아적는다. 에핑의 이야기는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우며 허무하다. 이 책을 중심적으로 잡고 있는 이야기는 에핑의 삶이다.
책은 크게 세 장으로 나뉜다. 첫번째 장은 주인공 M. S.가 자라온 배경과 그가 삶의 극단으로 향하는 여정이고, 두번째는 M. S.가 에핑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에핑의 이야기속에서만 존재하던 또다른 인물, 바버가 주인공과 실제로 만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나는 일상을 살아갈 때도, 서사를 접할때도 결론적으로 나, 또는 주인공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를 어떻게든 따져보려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이 소설을 다 읽고나서 그와 같이 따져보면, M. S.는 모든 것을 잃었으니 소설은 비극인 셈이다. 그는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인 자동차와 돈더미를 도둑맞았고, 사랑도 가족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비극이 아니다. 주인공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사랑과 이별의 경험을 했고, 삶의 극단을 추구해보았으며, 아름다운 게 무엇인지를, 그가 추구해야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제 알고 있다.
글을 끝내기에 먼저 폴 오스터의 수려한 문장에 대해 적고 싶다. 주인공은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며, 특히 첫번째 장에서는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깊은 사념에 툭하면 빠지고는 하는데, 그 생각의 흐름을, 생각에서 이어지는 행동과 곁가지로 붙는 또다른 사념들을 소설은 유려한 문장으로 쉴새없이 표현해낸다. 문장이 길 때도 많고, 문단이 오랫동안 나뉘어지지 않을 때도 많은데 눈에 피로하지 않고 주인공이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읽는 이에게 바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상자들은 내게 아주 쓸모가 있었다. 112번가의 그 아프트에는 가구가 들여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원하지도 않고 사들일 능력도 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그 상자들을 몇 개의 <상상적인 가구>들로 바꾸었다.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을 치수 별로 분류해서 여러 줄로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이 가구와 비슷한 형태가 될 때까지 이렇게 쌓아올렸다 저렇게 쌓아올렸다 하면서 하나씩하나씩 배열하는 그 일은 어찌 보면 조각 그림 맞추기 퀴즈를 푸는 것과 좀 비슷했다. 열 여섯 개의 상자로 이루어진 한 세트는 매트리스 받침이 되었고, 열두 개로 된 다른 세트는 테이블, 일곱 개로 된 다른 몇 세트들은 의자, 두개로 된 또 다른 세트는 침대 스탠드 받침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온 방안이 흐릿한 누런색이어서 좀 단조롭기는 했지만, 나는 자신의 재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은 이런 짓을 좀 이상스러워 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나를 괴짜로 보는 데 길이 들어 있었다. pg. 7
이따금씩 나는 두 창문 사이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달의 궁전>이라고 쓰인 네온 사인을 지켜보았다. (정리할 겸 달아놓는 각주: 그렇다, 소설의 제목인 <달의 궁전>은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의 창문에서 보이는 중국 음식점의 네온사인이다. 이 제목을 놓치지 않으면서 계속 끌고 나가기 위해 소설에서는 달과 관련된 이야기들과 상념들이 중간중간 언급된다. 소설의 첫장에서 주인공이 집에 남아있던 마지막 책들을 파는 날에는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 착륙을 했으며, 끝에서는 주인공이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면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식이다.) 그러는 것까지도 즐거웠고 그럴 때면 언제나 재미있는 생각들이 연달아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생각들은 제멋대로 떠오르는 연상이나 두서없는 회상이어서 이제는 좀 흐릿해졌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달 표면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본 이후로 달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쒸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내가 아이다호의 보이즈에서 닐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을 만났고 다음에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외계로 날아간 것을 보았다는 우연의 일치 때문에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단지 기아로 일시적 정신 착란을 일으켰고, 그 네온 사인의 불빛이 나를 꼼짝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어떤 것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달의 궁전>라는 단어가 신비하고 매혹적인 신탁처럼 내 마음을 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 단어 속으로 섞여 들였다. 빅터 삼촌과 중국. 우주선과 음악. 마르코 폴로와 미국 서부. pg. 51
그리고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 1장(내 멋대로 번호를 매겨놓은 것이지만)은 몇번이고 다시 찾아 읽을 거라는 걸 안다. 주인공은 어른이 되었으니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어린 청년이 말을 뱉듯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감정이 들어간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생각을 전한다. 그리고 그가 삼촌을 잃고, 사념에 빠져 인생의 끝을 향하는 것. 마지막으로 그가 고독에 휩싸인 순간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그를 구원해주려 나타난 친구가 건네는 말에 담긴 애정. 빅터 삼촌이 물려준 책을 하나씩 헤치워나가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 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탐험가의 옛 행로를 따라 그가 전인미답의 영토로 헤치고 들어갔듯이 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태양과 더불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마침내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 빛을 쫓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pg.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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