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휴초 2019. 11. 10. 01:41

일간 이슬아 수필집

작가: 이슬아

출판사: 헤엄출판사

 

투박한 제목이 눈에 띄어서, 가격에 충실한 두께와 빼곡한 글자에 이끌려서 산 수필집. 때문에 여기저기 화제가 된 기획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요즘 나온 책답지 않게 두꺼운 내지에 활자가 한가득 박혀 있어서, 두세 번은 나눠서 읽었다. 누군가가 상자에 소중하게 보관해둔 일화들의 포장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기분이었다. 며칠간 수필을 해치우면서, 점점 읽을거리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생생한 글을 읽는 즐거움에 취해있었다.

이슬아 씨는 한 글 당 오백 원씩, 한 달에 만원을 받고 본인이 쓴 수필을 팔았다. 이 책은 그렇게 3월부터 8월까지, 매일매일 반년동안 쓴 수필 85개를 묶은 수필집이다. 반 년동안 부지런히 하루에 한 개의 글을 썼다는 끈기도 놀라웠지만 한 번쯤은 글이 어설프거나 글에 공이 안 들어간 게 보일 법도 한데, 끝까지 오밀조밀 가치 있는 글밖에 없어서 더 놀라웠다. 게다가 그녀가 아끼는 주위의 사람들을 수필 안으로 끌어들일 때의 태도가 당당하고 솔직해서 인상 깊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게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지를 안다. 이 수필집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녀가 이겨냈을 두려움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수필을 몇 개 꼽자면, 그녀의 어머니가 타국에서 식당일을 한 이야기. 유럽 여행 중 쓴 수필. 친구 '양'의 이야기. 글쓰기 모임을 갖는 이야기. 

 

너는 나와는 달리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잖아. 그렇지만 가끔 너도 등잔 밑이 어두울 수 있으니까 말이야. 네가 알지만 까먹을 수도 있는 사실들을 나는 귀찮아도 계속 말해줄 수밖에 없어.

나는 조금 울고 싶어 졌다. 그렇지만 자기 코가 석 자인 애가 나에게 열심히 위로를 건네는 게 어이없기도 했다. 양은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약 원피스의 세계관 속에 있다면 나는 네 배에 꼭 오르고 싶은 사람이야.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피 같은 주인공의 기질이 내게는 없게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무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처럼 시니컬한 사람도 합류하고 싶은 시공간의 일원이 되도록. 서소를 매번 다시 새롭게 알아봐서, 계속 다시 태어나게 하는 주인공들처럼. pg. 494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나 날마다 어떤 일을 겼는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자리를 차지한 채로 하루하루 자라고 늙어가고 죽어간다. 별일이 없는 시간이나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낸 시간을 겪었다고 해도 시간과 함께라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을 겪고 나면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생길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날마다 완성할 거리가 있는 삶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일상이 이야기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일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칠 수도 있겠으나, 그것들을 자기 마음속에만 품고 살아가는 것과 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다. 모든 일상을 이야기화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그럼 이야기를 성급하게 완성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어떤 수간 속에 있을 때 시간의 속도대로 온전히 체험한다기보다는 마음이 먼저 미래에 도착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올지를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독자를 상정한 채고 인생을 겪는 건 뭔가 이상한 일이다. pg. 534

 

+수필을 읽다가 가장 반가운 순간은 작가가 내놓은 고민이 나와 일치할 때다. 소설을 읽을 때와 달리, 수필에서의 고민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직접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데, 이 책에서는 소설을 쓰고 싶어 했지만 어려워하는 고민이 그랬다. 빈약한 상상력 때문에 내가 분명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이 막상 서로를 만나고 나서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을 때의 절망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