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91025 #20 소비 그 덧없음에 대하여
#20
소비 그 덧없음에 대하여
마지막 과외비까지 모두 받아버린 후 나는 최근 흥청망청 돈을 쓴다. 카페를 들려서 단 걸 마구 먹으며 행복해한다. 한동안 관심을 끊었던 문구용품을 사들이고, 책을 한가득 사모은다. 피부용품도 세일 상품이라는 핑계로 망설이지 않고 여러 개를 사고,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배달앱으로 시켜먹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친구와 약속을 잡아서 식사를 했고, 핫한 카페에 가서 예쁜 조각케이크를 사 먹었다. 유난히 예쁜 케이크로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그 카페는 사람이 들끓어서 대기를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해야 했는데 그동안 친구와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스콘을 사고, 양말을 사고, 귀걸이와 키링을 사는 둥 자잘한 소비를 또 했다. 케이크를 해치우고는 올해가 끝낼 때까지 만나지 못할 거라는 괘변을 늘어놓으며 방탈출 카페를 갔다. 하루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게 오랜만이고, 기분이 이상하다. 거의 바닥이난 통장 잔고를 생각하니 암울하다.
용돈을 막 받기 시작하는 나이였던 열 셋 즈음의 나는 용돈을 한꺼번에 모아두었다가 날을 정해 주변 문구점에서 모아둔 돈을 탕진하는 짓거리를 즐겨했다. 책을 샀고, 반짝반짝 깜찍했던 액자를 샀고, 노트와 펜을 샀다. 눈에 한 번 들어온 물건은 바로 품에 안아 들고 계산대로 직행했다.
그 짓거리를 일 년쯤하자 어느 순간부터 내가 너무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언제부터였는지도, 정확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후부터 지금까지 물건을 집어 들고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습관을 들였다. 과연 내 소중한 돈을 여기다가 쓸 가치가 있는가? 질리지는 않을 것인가? 집에 있는 다른 물건이 이 물건을 충분히 대체해 줄 수 있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계산대에 들고 가는 물건들은 항상 튼튼하고 투박한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반짝반짝 빛나고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이면 모두 사들이던 옛날이 그리워졌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집어 든, 조금은 촌스러운 물건은 결국 내 성에 차지 않아 이용률이 현저하게 낮으며, 비참하게 버림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는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성인이 된 나에게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추억의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보물 상자가 없다. 사소한 공백이지만 그 공백이 쓸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부터는 마음에 드는 물건은 꼭 뇌에 새겨두었다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사고는 한다. 산 후에는 눈에 잘 보이게 모아놓는다. 모아놓고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정리를 하다 보면 물건을 아끼는 사람이 된 듯해 뿌듯하다. 좋아하는 물건이 방에 늘어날 때마다 행복하다.
아는 분이 돈을 가장 뿌듯하게 쓰는 대상 두 가지가 옷과 전자제품이라는 말을 했는데, 정말인 것 같다. 옷은 그 옷을 입고 나간 그날 하루의 기분을 책임져주고 자존감을 결정해주며, 전자제품은 삶의 전체적인 질을 올려준다. 그래서 이번 해 돈을 벌기 시작한 후에는 그 두가지에 돈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덕분에 내 방은 그 두 가지로 풍성하다. 나머지 돈으로 사들인 자잘한 애장품 또한 나를 기쁘게 한다. 하지만 내 돈으로 산 물건이 인생의 질을 올려준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냥, 소비를 했고, 나에게 남은 돈이 없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오늘의 주제인 이 슬픔은 한동안 구두쇠로 살다가 어린애처럼 충동적으로 통장을 비워버린 소비형태의 변화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어쨌든 소비라는 행위는 참 복잡하다.
소비로 생긴 물건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소비 때문에 비워진 통장은 다시 나를 슬프게 하고. 전자만 신경쓰고 후자는 거의 존재를 까먹은 갑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