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00일 글쓰기: 191017 #12 예능

휴초 2019. 10. 19. 03:39

#12

예능

신지야 잘 지내니

 

<아무튼, 예능>을 읽었다. 종이책을 읽을 때와 달리 이북리더기로 책을 읽을 때는 '당장' 눈앞의 텍스트를 독해하는데 바빠서 글의, 챕터의, 그리고 책의 큰 구조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는 한다. 그래서 글이 어지럽게 느껴진 건지, 아니면 원래 책이 정신없게 쓰인 건지 모르겠지만 기대한 것보다는 별로였다. 그래도 글쓴이의 예능에 관한 견해가 나와 비슷해서 결론적으로는 즐거운 독서였다.

인생 최초의 예능은 내 또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패밀리가 떴다>, <1박 2일>, <무한도전> 등등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건 <패밀리가 떴다>였는데, 그게 한참 방영될 당시에는 우리집에서 티비 시청이 금지였기 때문에 정말 드문드문 봤다. 낯선 여행지로 향해서 밥을 하고, 식재료를 구하고, 게임을 하는 게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좋아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1박 2일>을 좋아하셔서 가끔 틀어놓고는 하셨는데, 말도 안 되게 웃겼던 전성기가 살짝 지났을 때야 시청을 시작하셔서 그냥 그랬다. 친구들에게 항상 화제였던 예능은 <무한도전>이었다. <무한도전>을 챙겨보는 아이들은 왠지 모르게 '쿨'한 인상이었는데, 그런 인상을 동경해 나도 그 아이들을 좇아 부모님 몰래 시청하고는 했다.

쪽팔려서 말을 못하지만 나는 <우리 결혼했어요>의 열렬한 시청자였다. 어린 아이돌들이 나와서 꽁냥대는 게 마냥 좋았다. 용서 커플하고 태민-나은 커플이 나올 때 많이 봤다. 나는 뼛속까지 케이돌 덕후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폰에 DMB 기능이 있었는데, 티비엔과 엠비씨 에브리원 같은 자잘한 케이블 채널이 나왔다. 부모님은 그 기능의 존재를 몰라서 밤을 새워서 마음껏 봤다. 한참 공중파 방송국들이 케이블 채널을 잔뜩 만들 때여서 이런저런 아이돌 예능들이 판을 쳤다. 눈이 벌게지도록 아이돌 리얼리티를 챙겨봤다. 특히 <주간 아이돌>의 열렬 시청자였다. (요즘 <주간 아이돌>과 제작진과 엠씨가 그대로 옮겨간 <아이돌룸>은 옛날 그 느낌이 안 나서 아쉽다. 꼰대 같군요.) 예능을 보고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아이돌을 파고, 이 사이클만 일 년 안에 열 번을 돌린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는 글쎄, 딱히 좋아했던 예능이 없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양산형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아, <더 지니어스>가 있구나. <더 지니어스> 존나 재밌다. 머리 좀 쓴다고 자신하시는 분들한테는 특히. 근데 왜 말투가 싸늘하냐고요? 장동민 때문에요 하하.

 

예능에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페미니즘에 눈을 뜬 후였다. 그전까지 나는 왜 예능에 여자들이 그렇게 없는지, 설령 여자들이 출연을 하더라도 농담거리로 사용되다 퇴장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없었고 그냥 웃기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불편함이 찾아오자, 거의 대부분의 예능을 편하게 볼 수 없었다. 그 시간에 그냥 미국 시트콤들을 봤고, 유튜브를 봤다. 

 

수능을 끝내고 잉여의 삶을 시작하니 상황은 꽤 달라져 있었다. 나 같은 여성 시청자들의 수요에 맞춰 만들어진 것들이 꽤 보였다. 야금야금 예능을 챙겨보기 시작했고, 요즘은 거의 풍성한 정도다. 일주일 중 절반 이상은 시간에 맞춰 티비를 켜놓는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밥 블레스 유>. 여성 예능인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신나게 떠들 뿐인데 재밌다. 이영자의 호탕함이 좋고 최화정의 능청스러움이 좋다. 김숙과 송은이의 우정이 좋고 장도연의 당당함이 좋다. 자잘한 사연에 공감을 아끼지 않고 해주는 예능인 들의 태도가 좋다.

얼마 전부터는 <놀라운 토요일 도레미 마켓>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예능>에서 인용을 좀 하자면, 노래 가사를 듣고 출연자들이 정확하게 받아쓰는 와중에 유튜브에서 핫한 먹방 비제이가 옆에서 음식을 먹고, 붐이 진행을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소재들을 어설프게 짜맞춘듯한 모양새다. 불편하지 않게 웃기고 묘하게 흥미진진하다. 괜히 나도 노래가사를 맞춰보고, 이번에는 무슨 음식을 가져왔는지 살펴보고, 뭐 그런다.

<나 혼자 산다>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특별 출연할 때만 본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는 항상 챙겨본다. 인간 백종원에 대한 호감이 첫 번째 이유이고, 음식 예능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고, 틀어놓고 딴짓을 해도 되는 적당한 긴장감이 세 번째 이유. <골목식당>을 특히 과하게 열심히 본다.  <골목식당> 말고 매주 챙겨보던 다른 유일한 예능은 <삼시세끼 산촌편>이었는데 오늘 끝났다!! 내 금요일은 이제 어쩌나. 언니가 <구해줘 홈즈>를 좋아해서 옆에서 슬쩍 볼 때가 있는데 집세를 보며 경악하는 맛으로 본다.

싫어하는 예능도 많다. <아는 형님>: 무례한 웃김의 끝판왕. 범죄자 복귀 프로그램., <한끼줍쇼>: 낯선 사람에게 한 끼를 뜯어내는 발상이 좆같다., <신서유기>: 알탕 연대의 끝판왕. 마찬가지로 범죄자 복귀 프로그램., <하트 시그널>의 성공 이후로 마구 방송된 양산형 사랑 예능들: 그와 별개로 <하트 시그널>은 고급진 맛 때문에(출연자 선정, 편집, 패널들 모두 고급지다) 애정한다 ...... 옛날 예능까지 적어보자면 끝이 없는데, 뭐 내 예능 취향은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