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민지형

휴초 2019. 10. 19. 01:39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작가: 민지형

출판사: 나비클럽

 

깔깔거리면서 신나게 읽었다. 페미니스트 여자친구에 관한 소설이라니!

'나'는 사 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해 다른 여성들과 짧은 만남만을 반복하고 있는 한국의 평범한 남성이다. 부모님은 '나'를 볼 때마다 결혼은 언제 할 것이라며 닦달을 해대고, '나'는 임신 중단 합법화를 외치는 거리의 여성들을 보며 메갈들이 많아진 세상에 한탄한다. 그러다가 시위를 하던 무리 중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한 메갈녀가 '나'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전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둘은 오랜만의 재회에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 여자친구는 '나'를 보며 한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나'는 메갈이 되어버린 전 여자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궁금해한다. 

 

"그럼 너 혹시 그동안 그 미친놈들에게 당한 일 때문에 아까 그런 메갈 시위 나가고 그런 거야? 막 데이트 폭력 당하고 그랬어? 이런 씨... 어떤 새끼야?"

나는 나름 심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 난 실제로 메갈이라는 말 쓰는 남자 처음 본다." pg. 33

 

전 여자친구는 나에게 너와는 이제 연애를 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나'는 나의 사랑으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여 메갈로부터 탈출시키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연애를 계속 권유한다. 너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페미니스트가 된 거고, 메갈이 된 거잖아? 그럼 나 같은 한남 하나는 바꿔보는 걸 시도해봐도 되는 거잖아?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하게 되지만, '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그럼 얘기 좀 해봐! 나도 니 얘기 듣고 싶단 말이야."

자상한 남자친구답게, 나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살짝 재촉했다. 그녀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가 물었다.

"진짜 듣고 싶어?"

"응, 그럼. 뭐든 말해봐."

"그래. 그럼 말해줄게. 오늘 출근길에 이런 뉴스들을 봤어. 어젯밤에 어느 대학교 여성 전용 기숙사에 같은 학교 남학생이 불법 침입했대. 여학생들 강제 추행하고, 반항하면 때리고. 강남 클럽에서 여자들 기절시키고 강간하려고 쓰는 물뽕이라는 마약 기사도 봤는데 너무 끔찍했구. 초등학교 육학년이 스쿨 미투 고발글 올린 것도 봤어. 아, 어떤 래퍼가 이상한 노래도 만들었더라고. 이퀄리스트 뭐라더라? 포털에선 또 어떤 여자 연예인 이름이 살이 쪘네 어쨌네 하는 걸로 하루종일 인기검색어 1위였고."

"으응..."

"그리고 오후에는 성폭력 사건 소식을 들었는데, 재판도 못 가고 무혐의 처분이 났다는 거야. 전부터 피해자 분이 올린 글 봤었거든. 너무 열이 받아서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건지, 무슨 법대생도 아닌데 계속 찾아보고 있어. 기가 막혀서 진짜."

"어어..."

"그게 내 오늘 하루였어." pg. 103-104

 

여자친구는 여성과 관련된 일들에 분노하고(이래서 페미들이 일상생활이 힘들다는 걸까? 매일매일이 저렇단다), 더이상 화장을 하지 않는다. '꼴린다', '빻았다' 같은 여자가 쓰면 이상한 단어를 써대고, 담배를 맛있게 피운다. 담배를 피우면 태아에게 안좋을 텐데. 편한 옷을 입고 다니며 페미니즘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한아름 가지고 있다. '나'가 무슨 말을 건넬 때마다 여자친구는 '나'를 한심하게 보거나 따박따박 비판할 뿐이다. 오, 신이시여. 나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데. 내가 결혼 관련된 얘기를 꺼내면, 그녀는 택도 없다는 듯이 자신이 비혼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페미인, 메갈인 여자친구를 내가 이해해보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여자친구가 건네준 페미니즘 책은 예시도 부족하고 억지논리만 사용한 것 같아서 별로 와닿지 않고, 여자친구가 당하는 성추행은 여자친구가 먼저 여지를 줘서 그런 것 같다. 여자가 외모를 유난히 품평받는다고? 모르는 소리. 남자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너무나도 평범한, 그러나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는 몇 번씩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 절망적이었다. 당연히 책은 새드엔딩일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은 변했다. 성추행 사건에 일단 양쪽 입장을 들어보자는 베스트 댓글들이 원망스럽고,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던 성폭력사건들이 조금씩 여자친구의 일과 결부되어 심각하게 여겨진다.

유성애에 큰 관심이 없는 나에게는 조금 기괴하기까지 한 연애라는 관계에서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사회문제에 침을 튀기며 연인에게 페미니즘을 이해해주라고 부탁해야 할까? 연애뿐만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미지수이다. 다행히도 내 주변 친구들은 나와 의견이 거의 비슷하고, 따라서 나는 내가 심각하다고 느끼는 일들에 대해 솔직하게 내 의견을 내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이제 곧 생길 것이다. 사회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고,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로서 솔직하게 행동을 한다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라는 고민이 내 행동을 억압할 때도 생길 것이다. 내가 관심이 있는 일에 관해 침묵을 지켜야 할 때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여자친구는 (그녀의 이름은 끝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평범한 주인공의 이름은 김 빠지게 후반부에서 공개된다) 솔직하게 그녀의 생각을, 목표를, 행동을 모두 '나'에게 밝힌다. 그녀는 네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남자들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나'의 면박에 차분하게 대답한다. 대신 나는 바뀌겠지. 그렇게 곧고 당당한 그녀는 비현실적이었지만 감동적이었고, 조금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조금은, 주인공이 조금은 바뀌었다. 그 작은 결말이 내가 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이유 중 하나로 다가왔고, 희미한 희망처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