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출판사: 민음사
전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소설이었다. SF라는 장르만 듣고 한 순간도 정신을 놓을 수 없도록 급박하게, 흥미진진하게 서사를 쏟아내는 소설일 거라고 멋대로 예측하고 읽는 것을 시작했다. 뭐, 엄청난 오해였지만. 하지만 이 책을 끝낸 지금,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런 묘한 기분이 나를 덮치는 건 느리고, 세심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담담한 문체 때문이겠지.
SF라는 장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들지만, 나는 장르만 알았을 뿐이지 주인공들이 클론이라는 결정적인 정보는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책을 중간까지는 읽은 후에야 깨달았으므로 충분히 혼란스러웠고, 슬펐다. 자신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던 덤덤한 태도, 실현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무슨 직업을 가질지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보며 루시 선생님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헤일셤'에서는 개인의 소지품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바자회밖에 없어서 그 순간만을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린다는 구절이 나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 주디 브릿지워터의 테이프를 소중하게 여기는 캐시의 태도도. 어렸을 때는 -사실은 어렸을 때라고 하지만 멀리가지 않고 작년으로만 가도 충분하다- 일주일에 아버지가 손에 쥐어주시던 만원, 오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나에게 주어지던 유일한 물건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였고, 항상 열렬하게 고민을 하다 무슨 물선을 사는 게 나에게 가장 장기적으로 이득일지 판단하고는 했다.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시야에 담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고는 했고. 그렇게 선택한 물건은 대부분 소설책이나 소설 작법서이고는 했다. 책장에 남겨져 있는 수두룩한 책들이 그때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여러분도 과거에 '수집품'을 갖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헤일셤 출신을 우연히 만난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수집품에 커다란 향수를 갖고 있음을 조만간 알게 되리라. 당시 우리는 수집품을 갖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각자 자기 이름이 씌어 있는 나무함을 침대 아래에 두고 그 안에 각자의 소유물, 즉 판매회나 교환회 때 구한 물건들을 담아 두는 것이다. 기억하건데 수집품 같은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아이들도 한둘 있었지만 대부분은 몹시 신경을 쓰면서 전시해 둘 것을 꺼내고 다른 것들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해 두곤 했다. pg. 62
어쨌든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 테이프에 대해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는 케이스를 열어야만 담배 피우는 주디의 사진이 보이게 커버를 안쪽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 그 테이프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담배 때문도, 주디 브릿지워터가 노래를 잘 불러서도 아니었다. 내가 그 테이프를 그렇게 특별하게 여긴것은 거기에 수록된 노래 때문이었다. 셋째 트랙에 담긴 그 노래의 제목은 <네버 렛 미 고>였다. pg. 104
<네버 렛 미 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노래는 주인공 캐시와 루스, 토미를 묶는 소재이다. 캐시가 테이프를 잃어버리고 낙심하자 루스는 그런 캐시에게 어떻게든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 다른 테이프를 구해다준다. 캐시는 그 테이프를 우정에 대한 상징으로, 추억을 환기시키는 물건으로 가지고 있지만 막상 그 테이프를 많이 듣지는 않는다고 서술한다. 캐시는 루스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지만, 둘은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항상 어긋났던 기묘한 친구 사이었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토미는 여행 중 캐시와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기자 그 테이프를 찾아보자는 제안을 하고, 본인이 직접 찾지는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캐시가 찾아낸 그 테이프를 사서 캐시에게 선물을 한다. 후에 그 일을 안 루스는 캐시에게 악의를 가지게 되고 토미의 동물그림을 같이 비웃은 후 그 사실을 토미에게 내뱉어 버린다.
만약 루스가 기증자가 되어서 토미, 캐시와 다함께 재회했을 때 그녀가 코티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인을 위해서만 행동했으면 나는 루스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이 책을 덮었을 거고, 책의 결말이 가지고 있는 담담한 비극성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스는 바뀌었다. 그녀는 캐시에게 용서를 빌고, 캐시와 토미가 커플이었어야 했다는 진실을 알려주고, 그들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가치의 형체인 희망을 선물한다. 결론적으로 그 희망이 헛소문이었던 것으로 허무하게 밝혀졌다 하더라도, 나는 루스가 토미와 캐시를 설득하는 장면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녀는 죽음이 자신의 목전까지 찾아온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그녀가 살아온 삶의 오점들을 어떻게든 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용서를 빌고, 캐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후련한 마음을 지니고 눈을 감을 수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캐시와 토미가 마담과 에밀리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그 둘이 보인 태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합리를 느끼고 그 세계 안에 있는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베풀었던 호의조차도 생명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금의 인도적인 태도가 무엇을 바꿨겠는가? 캐시와 토미에게는 삶의 큰 부분이었을 헤일셤에서의 나날들을 얼버무리고, 추억의 일부분으로만 둘을 대하는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아, 소설을 이루는 글 구절 하나하나가 한 번에 눈에 들어오고 이해돼서 감탄이 나왔다. 이런 걸 압도적인 작문 솜씨라고 하는군,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