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종이 동물원> 켄 리우

휴초 2019. 9. 4. 15:57

종이 동물원

 

작가: 켄 리우

 

출판사: 황금가지

 

 

단편집을 읽는 재미를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책. 읽은 지 꽤 됐는데, 이제야 읽은 후기를 써본다. 침대에서 드러누워서 읽기도 했고,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길에서 읽기도 했고, 카페에서 읽기도 했다.

첫 단편부터 잔인하게 아름답고, 강력했다.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종이 동물원>은 영어를 거의 하지못했던, 중국 출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어린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의 포장지로 호랑이를 접어주고, 호랑이는 어머니의 숨결을 받고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종이호랑이에게 라오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어머니는 중국어밖에 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중국어를 못했다. 어머니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사람은 어린 '나'였다. 그런 '나'가 어머니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자라면서, 동양인의 피가 섞인 자신의 이질적인 존재가 사회에서 받는 멸시를 경험하면서부터였다. 어머니의 종이호랑이는 더 이상 신비롭지 않았고, 단지 너덜너덜한 종이였을 뿐이었다. "당신도 이제 영어를 배워야지." '나'의 중국어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들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어머니의 영어도, '나'에게는 억양 때문에 보잘것없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의 편지에서 울부짖는다. 왜 나에게 말을 걸지 않니. 나는 네가 유일한 나의 이해자여서 너무 기뻤단다. 나는 네가 오해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백인 남자에게 팔려온 것이 아니야. 나는 살아남고 싶었어.

모든 게 끝난 후에야 자신을 돌아보는 주인공이 위선적으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그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게 타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각인시킨 사회에게 잘못이 있는 것인데.

동양인이 주류 미국인들에게 취급받는 방식은 정말이지 혐오스럽다. 얼마전에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라는 영화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유튜브에서 영상을 이것저것 찾아봤다. 주연배우 둘이 엘렌 쇼에 나갔을 때, 엘렌이 여자 배우에게 가장 처음으로 던진 질문은, "Where are you from?"이었다. 평생을 미국에서 보낸 한국계 미국인이 영국의 백인 배우를 인터뷰했을 때, 백인 배우는 인터뷰어의 영어실력에 감탄하며, 친절하게 칭찬을 몇 마디 던졌다. 인종 간의 우위를 따질 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동양인은 타인인 것이다.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을 던지면 바로 답을 돌려주어야 하는. 이 작품이 작가의 비주류로써의 경험을 담고 있기에, 그리고 읽는 우리들은 그 처지에 공감할 수 있기에 이렇게 대단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종이 동물원> 외에도 작가의 정체성과 역사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이 넘친다. 홍콩의 역사가 떠오르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 대만의 이야기가 담긴 <파자점술사>,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의 상황인 것이 분명한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등등. 이 세 작품이 온전히 출판된 나라는 한, 중, 일중에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달했다고 한들 자신의 역사에 당당하지 않은 나라는 얼마나 초라한가. 마지막으로 가장 여운이 진하게 남았던 <송사와 원숭이 왕>의 일부분을 옮기고 포스팅을 끝내겠다.

 

"마지막까지 버티겠다, 이거냐?" 혈적자 소속 관리는 숫돌에 칼을 갈던 집행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집행해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사람들은 죽어가는 나를 보며 웃고 있잖아. 내가 바보짓을 했다면서. 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그저 가망 없는 대의를 위해 싸웠을 뿐.

아니야, 결코 그렇지 않아. 원숭이 왕이 말했다. 이소정은 일본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고, 아이들의 노래는 양주 땅을 넘어온 중국에 널리 전해질 거야. 언젠가는, 당장은 힘들겠지만, 어쩌면 100년도 더 걸릴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 책이 일본에서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아니면 이랑진군이 결국에는 내 둔갑술을 꿰뚫어 보았듯이 어느 명민한 학자가 자네 노래에 숨은 뜻을 알아차릴지도 모르고. 그러면 진실의 불꽃이 온 중국을 활활 타오르게 할 테고. 이 사람들도 노예처럼 멍한 상태에서 깨어날 거야. 자네는 양주에서 죽어간 이들의 기억을 지켜 냈어.

집행인은 전호리의 허벅지를 천천히, 길게 베어 큼직한 살을 잘라냈다. 전이 내지른 절규는 짐승의 울음처럼 날카로웠고, 가련했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 영웅이 되기는 글렀지, 안 그래? 나한테도 진짜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자넨 특별한 선택에 직면한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때 자네가 한 선택을 후회하나?

아니. 전호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고통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고 이성의 빛이 천천히 꺼져 가는 동안, 굳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

그 이상 뭘 더 바라겠나. 미후왕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전호리 앞에 허리 숙여 절을 했다. 황제 앞에서 굽실거리는 절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에게 바치는 경배였다.

 

가망 없는 대의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워냈던 과거의 사람들. 모든 것이 쌓여 지금의 자유를 이루어냈다. 그중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겠지. 우리는 과연 그들의 희생에 걸맞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까.

 

 

+) 중화인민공화국 = 중국, 중화민국 = 대만. <파자점술자>의 후기를 읽으면서 지금에야 찾아봤다. 내가 정말 많은 지식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 + 로봇>에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미디어 믹스가 되어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아무라도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