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 읽어온 책들 (2)
오늘도 책을 한 권 해치웠고, 읽으면서 느낀 건데 나는 어떠한 영상매체보다 소설을 읽는 게 편하고 즐겁다.
그나마 참으면서 보는 게 영화인듯. 두 시간만 참으면 되니까. 시즌이 거의 열개를 향해가는 드라마는 엄두도 못낸다.
8. 프리랜서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잡생각들: 신예희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서메리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프리랜서로 먹고사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들.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는 작가 본인이 회사를 다니다가 어떠한 연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살기로 마음먹었는지, 프리랜서 번역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본인이 무엇을 했는지를 적은 경험담 위주의 책이다. 그에 반해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는 20년차 프리랜서로 살면서 깨달은 것을 정리해놓은 조언들 위주.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가 더 내 취향이었지만 후자도 괜찮았습니다.
이런 책들을 찾고 읽어나갔을 때는 프리랜서를 지망했었지만 지금은 딱히.... 그래도 지금 하는 과외 선생 노릇도 일종의 프리랜서 아닌가요? 많이 도움이 됐다.
9. 새로운 삶을 상상하기: 김하나&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진아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내가 애정하는 유튜버 김겨울님의 리뷰 영상을 보고 찾아서 읽었다.
전자는 가볍고 유쾌하다. 미디어에서 거의 비춰주지 않고, 설령 비춰주더라도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루기가 쉽상인 중년 독신주의자 여성들의 이야기라서 궁금했다. 두 친구가 같이 집을 합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에세이. 중간중간의 사진들, 일러스트가 정겹고 글솜씨도 친근하다. 여자가 혼자 늙는다고 해서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차근차근히 쫓으면서 내 세계를 인내심있게 만들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점은 내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들이 두 작가의 일상 중간중간에 튀어나온 점. 그런 식의 친목 사랑합니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는 훨씬 무거웠다. 여성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작가 본인이 겪었던 남성 카르텔, 그 사이에서 결혼을 결정하고 실패한 경험, 여성으로서 광고계에서 여성혐오에 어떻게 일조하고 자신이 무엇을 돌려받았는지 등등. 현실 세계에서의 여성은 어떻게 교묘하게 차별을 받고 실패하기를 강요받는지가 담겨있다. 작가가 페미니즘으로 무엇을 깨달았고 무엇을 실천해나가고 있는지를 읽으면서는 벅차올랐다. 내가 사는 세계가, 내 또래 여성이 겪어나가는 사회가, 나보다 어린 여자들이 마주치는 현실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오늘날 보다도 훨씬 더 쉽고 공정하기를.
10. 중고로 사들인 절판된 책들:
배수아 <이바나>, 와카타케 나나미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무라카미 류 <달빛의 강>
11. 데이먼 나이트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소설 작법서만 몇개를 가지고 있는지.... 소설 작법서에 관한 내 기준은 명확하다. 작가의 경험보다는 이론에 치중해 있을 것. <유혹하는 글쓰기>, <쓰기의 감각>은 경험 위주라 그냥 그랬는데 다행히 이 책은 철저히 이론에만 집중하고 있음. 고전 of 고전이라 아는 내용들도 많았지만 도움이 많이 됐다. 아무도 안 궁금하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소설 작법서는 어슐러 르 귄의 <글쓰기의 항해술>. 이것도 절판된 책이라 도서관에서 두세번 빌려서 읽었었다.
12. 천명관 <고래>
내가 살면서 읽어본 한국 소설중에 가장 재밌었다. 동유럽 여행을 가는 길에 공항 의자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네시간동안 하늘위에 떠있으면서도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강렬한 문체, 멋있는 캐릭터들, 압도적인 서사. 이렇게 내 정신을 한동안 뒤집어놓은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거슬리는 게 있다면 그 시절 남성 작가 특유의 여성혐오. 여성의 본질, 남성의 본질은 따로 나눠놓는 것이라든지 여성을 성적인 의미로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든지 이것저것 누군가에게는 지뢰일 법한 묘사들이 넘쳐납니다. 끝으로 갈수록 늘면 늘지 줄지는 않으니까 초반에 아니다 싶은 독자들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수도. 춘희의 일생 중 후반부에서 특히 그 면모가 두드러진다.
후기를 보니 일일히 플롯을 계획하고 글을 쓴것이 아니라 무작정 쓰고났더니 이런 작품이 나왔다, 라던데 진짜..... 어떻게 이런 걸 막 쓸 수 있는건지.... 아직까지도 인상에 남는 것은 그때그때 나오는 인물의 미래를 암시하는 문장의 정기적인 등장. 그리고 그 암시가 무엇을 가리켰던 것이었는지 뒤를 읽어나가서 확인하는 순간 나를 휘몰아치던 쾌감. 이런 소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서사를 가진 어떠한 매체보다도 소설이 매력적이다.
13. 야마모토 히로시 <날개를 가진 소녀>
고 2땐가 교보문고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하고는 읽었는데 소재가 특이했던게 기억나서 중고서점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라이트 노벨 문체는 역시 거슬린다.
특이한 소재라는 건 여자주인공이 SF팬이라는 것과 책의 메인 테마는 비블리오 배틀이라는 것 이 두가지 뿐이다. SF 뭐 읽지하고 고민할 때 참고하기엔 괜찮을 듯.
14. 그레이슨 페리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책장을 뒤지다가 방금에야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는 미술 입문하려고, 그리고 미술관가서 진짜 뭘 위주로 감상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고른 건데 그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적당히 괜찮았음. 기존의 미술계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고, 그리고 미술을 선택한 사람들이 뭘 추구해야하는 지도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 읽은 지 몇달은 됐는데도 아직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나에게 와닿았다.
예술가로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은유는 '도피처'이다. 내가 혼자 들어가 세계와 그것의 복잡합들을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는 내 머릿속의 도피처. 그것은 내 내면의 오두박이고, 나는 그 안에서 기꺼이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정신분석가 스티븐 그로스가 쓴 글에는 프랑스에 있는 집을 새롭게 꾸미는 일에 대해 늘 이야기하는 환자가 나온다. 이 환자는 앞으로 그 집을 어떻게 장식하고 가구를 어떻게 새로 배치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이 주택 개조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몰입감과 기쁨을 안겨주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삶이 너무 힘겨워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주택 개조에 관한 생각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프랑스에 있는 집에 관한 멋진 계획을 짜는 것이 그에게는 긴장을 풀어 주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신치료 과정이 마무리되어 상담실을 막 나가려던 그가 돌아보며 말한다. "알고 계시죠, 그로스 선생님, 프랑스에 집 같은 건 없다는 거. 알고 계셨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그가 한 말이 내 안에서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가 찾아가는 그 장소, 그곳이 바로 그가 예술가가 되는 도피처였다. pg.182-183
15. 에이미 스튜어트 <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
1910년대 미국은 여성에게 얼마나 감옥같은 곳이었을까. 남편, 또는 집안에 있는 남자 가족이 없으면 여성은 생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선거권도 없다. 밤중에 집을 나가는 일은 엄두도 못낸다.
그 시대에서 이 책의 콘스턴스 턴은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다. 180을 넘는 거구에 남편도, 남자 가족도 없다. 여동생 두명과 세계와 단절된 채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살아간다. 농사를 짓고, 요리를 짓고, 비둘기를 돌보고, 옷을 짓는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던 자매들에게 난봉꾼 부자와의 일이 생기고,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콘스턴스는 소설의 제목처럼 총을 들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기다린다.
예전에 읽다가 초반에 내팽겨치고 오늘에야 끝까지 읽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오늘 읽을 때 재미가 훨씬 더했음. 1900년대 초 미국의 일상을 묘사하는 디테일도 줄거리 외의 재미.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책의 후기에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있음! 2권은 벌써 번역돼서 우리나라에 나온 것 같고, 3권, 4권은 번역까지는 안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