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82 한가함

휴초 2020. 2. 17. 01:22

#82

한가함

 

자취방 책상을 장식하고 있는 호아킨 소로야의 그림

 

정말로 한가하다. 약속이 별로 생기지도 않지만, 생기면 재깍재깍 받아들일 정도이고, 카톡 상태 메시지도 한가함이다. 한가함을 그렇게 즐기고 있지도 않고, 괴로워하지 있지도 않다. 언제나처럼 도태의 주원인인 트위터와 유튜브를 들락날락거리며 시간을 죽이다가, 이러다가는 개강 전에 100일 글쓰기를 끝내기는 정말로 글러먹었다는 걸 깨닫고 티스토리에 돌아왔다. 다행히 유행성 질병의 습격으로 개강이 2주 늦춰졌으므로, 조금만 부지런해진다면 100일 글쓰기를 학교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제목을 정할때 고심하지만, 정말로 다루고 싶은 주제도 없고 내 상태가 '한가함' 그 자체기 때문에 제목도 게으르게 지었다. 읽는 사람이 있다면 양해를 바란다.

 

정말로 한가해서 글을 안 쓴 2주 넘는 시간동안 아무런 신상의 변화가 없는 것은 또 아니다. 그토록 염원했던 자취방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막상 혼자 뒹굴거리다보니 심심해져서 언니를 불러서 2박 3일동안 눌러앉히기까지 했지만, 집에 있을 때보다 편한 건 사실이다.

 

수면패턴은 완전히 망했다. 갑자기 사극 드라마에 꽂혀서 세 에피소드를 연달아서 보다가 날밤을 샜고, 배송비를 현금으로 뽑아내겠다는 정신으로 짧은 외출을 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겨울 처음 보는 눈이라서 피곤함이 그득한 눈가 사이로 들뜬 감정이 뭉글뭉글 솟아오르다가도 등가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게 느껴졌다. 지구는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금을 뽑아내는 데는 실패했고 배송비는 계좌이체로 해결했다. 유난히 택배기사가 퉁명스러웠는데 날씨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가는것도 아니다. 도착한 좌식화장대는 마감이 허술하지만 높이도, 수납능력도 만족스러워서 괜찮은 구매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침대에 엎어져서 다섯시간을 내리 자다가 다시 깨어났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시간을 한심하게 죽이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에 잠드는 건 완전히 그른 것 같고, 이렇게 밤낮이 뒤집힌 채로 잠깐 사는 것도 어떤가, 싶다.

 

한가하고 게으른 이유는 할 일을 만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달 반 간의 여행이 준 교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할 일을 아이폰 메모장에 대충 휘갈겨두기만 하더라도 인생이 조금은 부지런해진다는 것인데, 어차피 개강하면 반강제적으로 부지런해질 나자신과 피폐해질 정신상태를 알기 때문에 할 일을 부러 만들기는 또 싫다. 그래서 중장기적으로 의미있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 중인, 예컨데 알바를 구한다든지, 전공공부를 미리 해둔다든지, 외국어 연습을 한다든지, 휴학생 되시겠다. 이렇게 도태되는 것인가하는 두려움도 정말로 땅끝까지 가라앉아있다. 위기의식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렇게 내 상태를 구구절절 딱딱한 문체로 정신없이 읊어대다보니 글 쓸 주제쯤은 건져낼 수 있는 일상을 살기는 해야겠다.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캘린더를 채워넣고, 필요한 쇼핑을 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할일을 몇 개 적어놓고 지워나가야지.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