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상상력이 빈약하다
#78
상상력이 빈약하다
돈을 무서울 정도로 벌고, 잘생겼다. 남자다. 나이가 많고 생활에 안정이 찾아온다. 그러고는 하나같이 성매매를 한다.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그런 생활을 유지하는 그들을 보며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무나도 상상력이 빈약해서 어이가 없다고 했다. 하나같이 부유함의 상징으로 그리는 추한 삶을 하나같이 꾸려나가는 게 너무나도 전형적이고, 한심하다고.
한때는 늙은 여성을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얼굴에 주름이 보이면 젊은 날의 사진을 가져다 대며 젊은 게 좋지, 늙어서까지 화면에 얼굴을 보이다니.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볼 때도 불편했다. 마흔이 넘어도 이십대 초의 모습을 기적같이 유지하는 자들을 찬양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미친 듯이 부끄럽고 과거의 나처럼 어린 여성이 그런 생각을 꾸려나가도록 여론을 이끄는 사회가 징그럽다.
무슨 중년의, 노년의 인생을 꾸려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방금 전에 일상 예능을 봤다. 화려한 솔로 가수로 이십대를 보내고, 이제는 연기 커리어를 차근차근히 쌓아나가는 삼십 대 후반의 여성 배우. 특이한 구조의 집에서 고양이 두어 마리를 키우며 스쿠터를 몬다. 친구가 그려준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좋아하는 책들과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쌓인 필모그래피를 상징하는 듯한 대본집들. 좋아하는 화가의 이름을 고양이에게 붙여주고 가끔씩 친구들을 불러 모아 콘셉트를 잡아서 파티를 연다. 멋있고 단단해서 부러웠다. 무엇보다,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광고에서 찍어내는 판에 박힌듯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시선이 바뀌면서 예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여성들의 멋있는 삶이 하나둘씩 마음에 들어오고, 내가 뭘 추구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제는 비주류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수가 많아졌고 어디 가서 특이하다는 소리도 별로 안 듣지만, 그래도 전형적이지는 않은 건강한, 현재가 행복한 생활. 저렇게 나이가 들고 싶다.
모비딕,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은 일명 '소년' 소설, 그리고 모험 애니메이션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훌륭한 위인의 전기를 읽을 때도 가슴이 들뜨고 세상이 넓고 푸른 바다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무언가 위대한 걸 이루어 낼 수 있을것 같고, 돈을 무지무지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고, 세상에 분명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일상은 벅차게 다가올 때도 많다. 그러면 소소한 일본 소설을 읽고, 돈은 많지만 티를 절대 안 내고 일상을 보람차게 살고 있음을 강조하는 무채색의 브이로그를 멍하니 바라본다. 거대한 걸 이루어내지 않더라도 일상에 작고 사소한 행복이 가끔씩 찾아왔으면, 남이 보기에 깔끔하고 예쁜 인생을 살고 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이 두 개의 삶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이루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쟁취해내고 말 것이다. 남이 상상하기 힘든, 상상력이 넘치는 단단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