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69 이탈리아 1: 밀라노

휴초 2020. 1. 3. 22:27

#69 

이탈리아 1: 밀라노

 

1.

일단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여행할 때 주의할 점을 감히 조언해 보겠다. 숙소를 잡기 전에 교통편을 먼저 알아봐라.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건너갈 때 야간열차를 타려고 검색을 하다가, 한심하게도 비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뮌헨에서 출발한 열차가 베니스에 도착하면, 베니스에서 밀라노로 가는 짧은 열차로 다시 환승을 해야 했는데 웃기게도 밀라노의 다음 여행지가 베니스였다. 이미 친구와 내가 묵을 이탈리아의 호텔과 기차표는 다 결제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밀라노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음, 그 전에 야간열차를 탑승해본 후기를 짧게 적어보자면 불편하고 비싸고 찝찝하다. 웬만하면 타지 말라. 표는 웬만한 호스텔의 1박 가격보다 비쌌으며, 덜컹거리는 소리와 승무원과 운전수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잠을 자기가 힘들었고, 씻을 수도 없었으니 찝찝한 것은 당연하다. 운이 좋게도 비성수기에 표를 구했는지 6인실에는 나와 스웨덴에서 온 여성분 둘만이 승객으로 있었는데, 만약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깜깜하다. 침대칸은 어이없을 정도로 좁고 3층 침대는 난간도 없이 높으며, 잠 울 놓을 공간은 전혀 없다. 간단한 조식을 주지만 훌륭하지는 않다. 게다가 몇 시간이면 이동할 거리를 밤새 승객이 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이동해야 하므로 몇 번씩 멈추는데,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객실을 같이 쓴 금발 여자분과 띄엄띄엄 대화를 시도하다가 도착한 밀라노는 축축하고 기분이 나빴다.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날씨에 기분이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커다란 짐을 끌고 있고 우산은 작은데 세차게 비를 뿌려대는 도시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젖은채로 도착한 호스텔은 다행히 괜찮았다. 

친구와 어찌해서 만나고, 짐을 정리하고, 대충 엉망인 꼴을 정리하고 유명한 두오모 성당을 구경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이때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분명히 충전을 시켰다고 생각한 내 폰이 전혀 충전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일단 들고 나가서 시내를 구경했다. 다행히 날은 좀 개어있었으며 두오모 성당은 미치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통합 관광권을 구매해서 작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성당 내부를 들어가 보았다. 친구를 흥분시킨 것은 성당 근처에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나는 뮌헨에서 나름 화려한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을 이틀 밤동안 실컷 구경하고 온 직후라 꽤 심드렁했는데 (실제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처음 몇 번 일 뿐, 파는 물건은 뻔하고 음식도 뻔하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를 처음 겪는 친구는 다른 듯했다. 그렇게 깜깜한 밤이 되자 안 그래도 얼마 남아있지 않던 폰의 배터리는 다 닳아 버렸고 나는 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어놓고 친구와 팔짱을 끼고 마켓 구경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또 더럽게 많았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친구 A는 본인의 취향이 확실한 인간이고(내가 이 친구를 확실히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인의 취향에 들어맞는 물건이나 가게를 볼 때마다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게 특징이다. 스노우볼과 트리 장식물, 목걸이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먹거리. 친구는 흥분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사들였고 본인의 손이 다 차자 에코백을 들고 다니던 나에게 자신의 짐을 좀 맡겼다. 이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지하철역으로 돌아와 보자, 주머니에도 에코백에도 나의 폰은 없었다. 짐을 들어주느라 정신은 없지, 어차피 배터리는 다 닳았으니 꺼내 볼일도 없으니 중간중간 확인도 안 했지. 처음에는 금방 찾을 줄 알고 주머니와 에코백을 침착하게 뒤져보았다. 몇 분을 투자해도 폰은 없었다. 이때까지 들린 마켓과 가게들을 다시 돌아가 봐서 확인해봐도 내 폰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아이폰을 맥북과 연동시켜둔 덕분에 여행 도중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들은 모두 아이클라우드에 백업이 되어 있었으며(사실 이 점이 가장 걱정이었다) 아이클라우드 계정의 비밀번호를 바꿔두니 내 폰을 가져간 사람이 폰을 악용할 가능성도 없었다. 약간의 불편함만 찾아오겠다는 예상을 했다. 전혀 틀린 예상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뭐.

 

2.

다음날 아침에 최후의 만찬 영어 투어를 예약해놓아서 그걸 가느라 일찍 일어났다.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서 사야하는 티켓은 인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몇 달 전부터 구해놓아야 하는데 그 사실을 몰라서 이틀 전인가 급하게 구한 투어였다. 투어를 진행하시던 가이드분은 친절하셨고 같은 일행의 반응을 보면 내용도 준수했던 것 같지만 졸리고 추워서(정말 추웠다!) 즐겁지는 않았다. 최후의 만찬을 직접 본 소감도 딱히 적지 않겠다. 그냥 봤다고 일기장 구석에 적어놓을 정도의 감흥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같은 성당을 구경했다. 그 전날은 성당의 내부만 대강 둘러봤는데, 이 날은 꼭대기 층까지 걸어올라가서 밀라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두오모는 정말 화려하고 기묘할 정도로 정교하다. 비와 흐린 하늘 때문에 온갖 짜증을 다 삭히느라 무슨 장엄함을 느꼈다든가 감동을 받았다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경치만은 기억 속에 길게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