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00일 글쓰기: 191218 #67 강제 모바일 디톡스

휴초 2019. 12. 22. 08:00

#67

강제 모바일 디톡스

 

한동안 100일 글쓰기를 못했다. 뭐, 아예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굳이 둘러대 보겠다. 아이폰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혼자 다닐때는 사소한 물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안전하게 한 달 동안이나 돌아다녔는데, 친구가 합류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무려 폰을 도둑맞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오히려 일행이 생겨서 긴장을 풀었기 때문에 폰을 손에도 들지 않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고, 소매치기에게 틈을 보였다. 아, 이탈리아 거지들은 진짜 사납고 무섭다. 

막상 폰을 도둑맞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엥, 폰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거지. 막연히 폰이 없으면 못 하게 될 것들을 나열해보았다. 일단 이때까지 찍은 사진과 영상이 다 없어지는 것이고(웃기게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이거였다) 이동시간에 할 게 없어지고, 사진도 못 찍고, 구글 지도도 이용 못하고 등등등. 몇 개는 친구의 폰이 남아있으니 해결되고, 나머지는 뭐, 조금 불편할 정도일 듯했다.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폰과 연동시켜놓은 맥북을 살펴보니 여행 중 찍은 사진과 영상도 아이클라우드에 다 남아있었다.

굳이 집어내자면, 내 돈으로 직접 산 물건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서 안심한 면도 있다. 부모님이 고르시고(가격을 계속 언급하셔서 가장 안 좋은 기종으로 골랐다. 덕분에 빛이 다 번져서 제대로 야경을 찍을 수도 없다) 알아서 사서 건네주신 물건. 오히려 여행을 다니면서 모은 자석 더미들이나 책을 잃어버렸으면 내 시간과 취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에 울적했을 것 같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도 아니다. 지갑이, 특히 신용카드가 없어졌으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었을 것이다.

폰을 못 쓴지 며칠이 된 지금은 또 그 불편이 생각보다 크다는 생각에, 혼자서 짜증도 삭히고 다른 경우의 수도 헤아리고 그러고 있지만, 스마트폰과 이주일 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하나의 긍정적인 경험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여러 상상을 하고 있다. 이야기들이 잘 풀린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피드백을 받고, 이 일련의 과정을 무시하고 그냥 눈에 담는 게 편하다. 순간을 느끼는 게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