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00일 글쓰기: 191215 #63 가자 해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휴초 2019. 12. 16. 02:59

#63

가자 해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베를린은 정말 춥다!! 아침부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렇게 춥다니, 아씨, 를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다녔다. 나름 목도리도 챙겨서 매고 코트도 야무지게 걸쳤는데 몸이 덜덜 떨려왔다. 원래 계획했던 일정의 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갑자기 가기 싫어진 곳이 몇 개 있고, 운영을 하지 않았던 곳이 몇 개 있고, 해가 너무 빨리 져서 그냥 숙소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던 것도 있어서였다. 

오늘의 패착은 휴대폰 보조배터리를 밤새 충전하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두 시가 됐을 때였나, 배터리가 다 닳아버렸다. 하루 종일 데이터를 켠 상태로 구글맵을 사용하다 보면 이런 일은 흔한데, 보조배터리를 그래도 삼십 분은 사용할 수 있겠거니 하고 충전을 시도해봤는데 몇 분만에 보조배터리가 작동을 안 했다. 다행히 일반 충전기는 챙겨 와서 근처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우고, 폰을 충전하려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모든 카페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일요일 오후였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카페를 일일히 들어가서 자리는 있는지, 충전할 곳은 있는지 살펴봤는데 몇 번을 연달아 실패했다. 심지어 맥도날드마저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겨우 찾은 개인 카페에서 (최후의 보루는 스타벅스였는데, 왠지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시간을 때우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도시를 돌아다닐 때는 스타벅스를 가기가 꺼려진다..... 용감한 여행자가 아닌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폰을 충전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해가 질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는데, 아니 이렇게 빨리 해가 질 지는 몰랐지. 보충 설명을 하자면, 내 스마트폰은 최신형이 아니라 야경을 카메라로 잘 담지 못한다. 빛이 흉하게 번져서 사진이 찍힌다. 그나마 카메라가 제 기능을 하는 시간대는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라서 나는 그 때를 잘 기다렸다가 신나게 카메라 앱을 이용하고는 한다. 해가 급속도로 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서둘러 나오다가, 장갑을 한 짝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기념품샵을 찾아가 이것저것을 샀다. 모자도 사고, 자석도 사고, 엽서도 한 장 사고.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도심의 이름 모를 크리스마스 마켓과 마켓 옆의 관람차의 괜찮은 사진을 몇 장 건지기는 했지만, 정작 내가 가려고 했던 커다란 크리스마스 마켓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어두웠다. 

몸을 떨면서 새로 산 장갑을 끼고, 정신없이 걷는데 하늘의 흐름이 보였다. 원래 있던 곳의 하늘은 껌껌하고, 진한 파랑색으로 이미 물들여져 있었는데 향하는 곳은 아직 해가 머물러있어서 옅은 빛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하늘만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가 머물러 있는, 좀 더 밝은 곳으로 발을 옮기며 그때의 그 순간이, 빛이 좀 더 많은 곳으로, 해가 아직은 머물러 있는 곳으로 간다는 표현이 동화적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는데도 무척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