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91205 #53 적당히 축축했지만 저에게는 폭우였다고요
#53
적당히 축축했지만 저에게는 폭우였다고요
날씨
어제에 비해서는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유럽의 비 오는 날,이 적당한 표현 되시겠다. 하늘은 하얬고, 비는 띄엄띄엄 내리고. '츄레리아'라고 유명한 츄러스 집을 찾아가 아침을 해결했다. 한국인이 드글거렸다. 종업원이 한국말을 하는 기행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직원은 동양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영어로 수줍게 주문하는 것에 꽤 익숙한 눈치였다. 따뜻하고, 바삭바삭하고, 달콤했다. 가격 대비 가장 괜찮았던 스페인의 츄러스라고 감히 단언해 본다.
미로 미술관
미로 미술관까지 걸어갔다. 왜 나는 미로 미술관이 온갖 역사적 그림들을 잔뜩 갖추고 있는 대형 미술관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등산 수준으로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라가 마주한 미로 미술관은 아담하고 깔끔했다. 이름처럼 스페인의 화가, 미로의 작품을 충실하게 갖춘 이 미술관은 화가가 직접 건축가에게 의뢰해 지은 곳으로, 미로의 연도별 작품은 물론 그와 관련이 있던 다른 작품, 그리고 스페인의 현대미술 임시 전시까지 어떻게 보면 아담한 건물 안을 작품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로의 작품을 연도와 주제 별로 깔끔하게 배열해 놓은 모양새며, 헷갈리지 않는 동선이며, 괜찮은 퀄리티의 오디오 가이드까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역시 건물 그 자체였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 왔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한탄을 속으로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높은 고도에 위치하는지라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보였으며 테라스는 아기자기하게 예뻤고 야외의 설치미술까지 근사했다. 아쉬운 대로 하늘이 새파랗게 예쁜 날 미술관을 찍은 엽서 몇 장을 샀다. 미로의 마스코트와 같은 자화상을 담은 엽서 하나까지 함께.
이번 미술관까지 해치우고 나서 나의 미술관 취향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 1. 현대 미술관. 특히 해당 미술관이 위치한 나라, 혹은 지역의 특색을 잔뜩 담은 현대 미술관이 좋다. 오디오 가이드 혹은 옆에 붙여진 설명이 충실하면 더욱 좋다. 2. 한 예술가를 다루는 아담한 미술관. 호아킨 소로야 미술관, 피카소 미술관, 미로 미술관처럼.
오히려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사실 이 구절도 웃긴 게 영어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별하지 않는다. 박물관: museum, 미술관: art museum, 이라고 미술관을 좁은 주제의 박물관 취급하는 게 굳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 거대한 미술관은 항상 발목과 발바닥이 욱신거리는 상태로 기가 다 빠져서 나오고 만다. 내셔널 갤러리, 프라도 미술관 같은 경우. 역시 그런 곳들은 관심 있는 작품과 화가를 미리 조사해놓고 코스까지 짠 후 방문하는 게 나에게 있어서는 정답 같다.
무작정 걸으며
근처에 있는 몬주익 성을 가려고 했는데, 날씨가 꿀꿀해서, 몬주익 성 입장료가 아까워서 찾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케이블 카를 타지 않고(이용료가 비쌌다!) 걸어가려니 역시 길은 험악했고, 비는 다시 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포기하고 찜해놓았던 맛집을 찾아갔다. 몬주익 지역에서 밤까지 버티다가 몬주익 분수 쇼를 보는 게 목표였는데, 찾아갈 곳도 딱히 안 보였다. 최선책 맛집 대문 앞까지 같다가 사람들이 꽉 차있고, 왠지 제대로 된 바(bar) 같은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차선책 맛집으로 향했는데, 뭐 여기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무작정 들어가 유명한 요리와 샹그리아를 시켰다. 꿀 대구와 맛조개. 메뉴를 못 찾고 어벙하게 손가락으로 스페인어 사이를 헤매고 있으니 친절한 종업원 한 분이 오셔서 도움을 주셨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꿀 대구? 맛조개? 이러면서 능숙하게 주문을 받으심. 뭐야 여기 무서워..... 약간의 인종차별을 받은 것 같은데 의외로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꿀 대구는 많이 달았고 맛조개는 딱 괜찮은 정도. 다시 오지는 않을 것 같은 적당한 요리에 거의 30유로를 썼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들른 곳은 '바다 성당의 성 메리'라는 성당. 일단 이름을 보고 반했고 사진을 보니 건물도 예쁜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자석 하나를 샀고,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숙소로 돌아왔다.
제목이 이런 까닭은 날씨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지만, 어제에 비해 비가 많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중간중간에 비가 멈추기까지 했지만, 기분은 폭우 때보다 더 꿀꿀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감정에 다소 둔하다. 감정은 미친 듯이 휘몰아오는데, 정작 감정을 겪는 당사자인 나는 이게 무슨 감정일지를 곱씹고 판단하려다가 아무런 정답도 찾지 못하고 멍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굳이 그걸 정의 내리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만약 그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빠져나올지를 고민하면 되는데 말이다. 오늘은 계속 곱씹었고, 판단을 못 내렸고, 생각을 많이 했다. 한국에서 우울해 미칠 것 같으면 그랬듯이 안 그래도 되는 거리를 굳이 걸었다. 우울한 나를 책망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굳이! 평소엔 국뽕이라며 질색하는 영국 남자 채널을 정주행 하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의 근황을 뒤졌다. 그러다가 내가 빠져나오려고 했던 상태의 반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행을 와서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려다가 그냥 영화를 틀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에피소드 몇 개를 뒤적이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