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91128 #46 마드리드 (4)
#46
마드리드
여행을 하면 나 자신을 잘 알게 된다는 말이 오늘따라 와 닿는다. 오늘 깨달은 것은 내가 생각보다 혼자 뭘 즐겁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게 보장된 개인적인 공간이나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카페 같은 공간이면 말이 또 달라지지만, 또 모두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는 길거리에서도 혼자인 것을 즐기지만, 뭔가를 사먹을 때, 커다란 왕궁을 돌아다닐 때, 쇼핑을 할 때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 먹을 때가 가장 심하다.
방금 산 미구엘 시장을 다녀왔다. 후기를 보고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고 역시 그냥... 아담한 백화점 지하 같은 분위기였다. 문제는 대부분 타파스, 즉 술안주를 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술을 혼자 마시고 싶지도 않고, 식사가 될 법한 육류가 끼워져 있는 빵 두 개를 7유로에 샀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샹그리아도 살까 하고 가격을 보니까 7유로가 넘더라..... 이번 주치 현금을 다 썼다는 게 문제다 썅.... 울먹거리며 길가에서 안주를 다 먹어치우고(맛도 그냥 그랬다... 생연어 한 덩어리 립 한 덩어리..... 축축한 빵과 시들시들한 야채....) 숙소에 돌아와 간식거리로 산 초콜릿과 물로 배를 더 채웠다. 그냥 근처 버거킹에서 맥너겟과 콜라를 사 먹었으면 훨씬 더 훌륭한 한 끼가 되었겠지만 시장까지 굳이 나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게 재미지 뭐.
오늘은 뭘 했냐면요
아침에 마드리드 왕궁을 다녀왔습니다. 오디오가이드를 따로 사는 것도 귀찮고, 그냥 둘러보고 사진만 찍을 것 같아 한 시간만에 구경을 간단하게 맞췄다. 셀카도 한 장 건짐. 그러고 나서 걸어서 소피아 예술 센터로 향함.
오늘 다짐한 것은 나만의 미술관 구경 원칙을 세워두자.
1. 가장 유명한 작가가 들어있는 층 부터 찾아가자. 반드시.
2. 그러고나서 중세와 르네상스 등 관심 없는 시기의 방도 패스하자.
3. 오디오가이드는 저어어어어엉말 중요해 보이는 작품이 아니면, 중요해 보이더라도 나에게 와 닿지 않는 작품은 따로 설명을 듣지 않는다.
4. 방에 비치되어있는 코팅된 안내 책자를 적극 이용하자.(이 책자의 정체를 오늘에야 깨달았다!)
4층부터 순서대로 내려갔는데 4층에서 즐겁게 지내는 동안 내 발과 다리는 한계를 맞이했고 결국 하이라이트였던 2층에서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내 저질스러운 체력과 발 상태가 오늘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으아아아아 아
피카소와 달리, 스페인 작가들 작품을 원 없이 봤다. 관심 있는 작품과 작가는 아이폰 메모장에다 일일이 기록해두었다. 게르니카의 위압감에, 피카소가 그림 하나를 그리려고 수없이 스케치한 자국들에, 달리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초기 모습에(달리와 큐비즘이라니 신기했다), 현대 작가들의 대범함에 즐거웠다. 2층 조금과 1층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서 내일 또 찾아갈까 고민 중. (입장료가 국제학생증 소유자에게는 무료다!) 기념품점에서 자석과 엽서만 사려다가, 미술관을 구경하며 폰으로 타이핑하는 게 번거로워 눈물 나는 가격의 노트를 하나 샀다. 이럴 거면 런던에서 불렛 저널 안 버릴걸 아이씨..... 인생이란 정말 한 치의 앞도 못 내다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정신을 차렸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 숙소에 터덜터덜 돌아와서 유튜브를 폰으로 돌아다니느라 한 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다가, 아,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뭐라도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아까 말했다시피 산 미구엘 시장을 향했다. 음식은 맛없었고 돈도 낭비한 듯싶지만 그래도 인터넷의 무한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엄청 흔치 않은 일이거든!
짐을 싸고, 씻고, 내일 계획과 바르셀로나 계획을 짜고 놀 것이다. 오늘은 어떻게 놀지 대충 다 정해놓았다, 헤헤. 마침 숙소도 텅 비어있어서 독방을 쓰는 기분으로 들뜬다. (물론 안심해서 안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열 시 즈음에 벌컥 새 룸메를 맞이해본 적도 있는 걸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