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91121 #39 런던 (4)
#39
런던(4)
버스 안에서
어제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기분 좋게 침대에서 뒹굴던 것도 잠시, 이층 침대 아래층을 쓰는 백인 새끼가 코를 시끄럽게 골기 시작했고 나는 한숨만 연거푸 쉬며 두 시간 동안 뒤척여야 했다. 오늘은 기어코 이어폰을 구해야겠다.(못 구했답니다 하하) 화난 상태로 호스텔-코골이/hostel-snoring 이딴 검색어로 구글링을 했는데 이런 케이스가 수두룩하더라. 어떤 미국인 새끼가 "너는 싼값에 숙소를 구했으니 그걸 감당해야 하며 코 고는 당사자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이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까지 봐야 했다.
오늘은 안타깝게도 날씨가 흐리다. 이층 버스에타서 폰으로 타이핑을 하고 있다. 하루가 갈수록 추워지는게 느껴져서 무섭다. 엄마가 챙겨준 장갑은 스마트폰 터치기능이 탑재되어있지 않아서 사실상 실용성이 없고(길을 돌아다닐때는 구글맵을 반드시 이용해야하는 현대인인데 그것도 고려하지 않았다니 나는 멍청했다) 기모레깅스를 챙겨 입지않아서 슬랙스와 맨다리 사이로 차가운 바람은 가차없이 침투한다. 런던은 이상하게 아침이 가장 따뜻한데, 그러니 오후는 더욱더 싸늘할것이다. 그나마 실내만 돌아다니는 일정이라 다행이다.
교훈은 거대 박물관/미술관은 하루에 하나씩만 구경할 것
오늘의 일정!
1. 대영박물관(오디오 가이드 이용하기)
2. Gay’s the World
3. 내셔널 갤러리(오디오 가이드 이용하기)
4. 초상화 박물관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 둘 다 거대하기로 유명한 장소라서 뒤늦게 이 두 개를 한꺼번에 보기로 한 게 과연 맞는 짓이었나 하는 현타가 왔다. 초상화 박물관은 사실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안 했음. 그리고, 그 걱정이 맞았다.
대영박물관은 그냥 그랬다. 그렇다고 왜 갔지! 하는 후회까지는 안 한다. 후회는 하지 말자라는 인생 모토는 제쳐두고도, 오랜만에 박물관에 가서 새롭기는 했으니까. 머리에 든 게 예전보다 그렇게 많아진 것도 아닐 텐데, 시야가 달라진 게 느껴져서 신기했다. 오디오 가이드에 포함되어있는 코스 몇 개만 돌고 나왔는데도 세 시간 동안은 있었다. 이집트 관련 수집이 가장 풍부했고,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중세시대 컬렉션과 대영박물관을 만드는 데 일조한 초기 수집가들의 이력. 한국관도 있길래 한번 들려봤는데,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아주 귀여운 자석 하나 건짐.
Gay's the world는 퀴어 전문서점이다. 누가 한번 가봤다고 자랑하길래, 그리고 대영박물관 근처에 있길래 한 번 들려봤다. 긴 여행 동안 심심할 때 읽을 책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책을 구해야 하기도 했다. 레즈비언 픽션 섹션, 게이 픽션 섹션, 페미니즘 섹션, 이론서 섹션 등 소장 책들이 꼼꼼하게 배열되어 있었고 퀴어 굿즈도 아기자기하게 팔고 있었다. 레즈비언 소설책 두 권과 퀴어 배지를 하나 샀다.
그리고 서점에서 내셔널 갤러리까지 가는 도중 조금 헤맸는데, 헤매는 덕분에 마틸다 뮤지컬 극장을 발견했다. 이것도 운명이겠다, 그냥 티켓을 사버리자! 하고 들어가서 내일 밤에 하는 공연 티켓 하나를 사버렸다. 따라서 내일은 숙소에서 뒹굴다가 느긋하게 나갈 예정이다. 런던 밤거리가 무섭기는 한데, 이것도 한 번 해보는 거지 뭐.
내셔널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정말 정말 정말 커다란 미술관이어서 놀란 게 첫 번째. 오디오 가이드를 구매하고, 지도를 사고 가장 오래된 작품부터 찬찬히 살펴보자니 다리가 너무 아팠다. 일단 팸플릿에 적혀있는 유명한 작품만 둘러보자 했는데, 하나도 재미가 없지, 다리랑 발은 미친 듯이 아파오지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관심 있는 화가의 작품만 표시해서 그것들만 둘러봤다. 루벤스, 렘브란트, 반 고흐, 세잔, 모네, 마네, 그리고 르누아르. 이제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조금 신나려는 참에, 발이 너무 아파서 아쉬웠다. 그리고 너무 늦게 미술관을 들어가서 반 고흐 작품까지 끝내고 나니 기념품샵을 들릴 틈도 없었다. 내일 다시 들려서 엽서와 자석을 사야겠다. 박물관을 가기 전에 내셔널 갤러리를 먼저 갈 걸. 숙소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세트를 사 먹고 오늘의 일정은 끝.
1. 대영박물관(오디오 가이드 이용하기) V
2. Gay’s the WorldV
3. 내셔널 갤러리(오디오 가이드 이용하기) V
4. 초상화 박물관
그래서 내일은
원래 내일은 옥스퍼드 대학가를 구경하려고 했다. 근데 그 먼 곳을 돌아다니고 나서 뮤지컬을 보러 런던 중심부로 다시 올 엄두도 안 나고, 비용 걱정도 되고. 일단 자잘한 쇼핑 (패딩턴 인형과 오늘 못 산 내셔널 갤러리 기념품, 셜록홈스 굿즈)을 하고, 찰스 디킨스 박물관을 구경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뮤지컬을 봐야지.